신창동 유적이 말하는 마한

2022. 12. 4. 07:5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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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유적의 벼 껍질 압착층

마한은 백제가 그 지역을 병합하기 이전의 국가들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들을 말합니다. 문자기록이 많지 않은 시기이고 고대 왕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료가 빈약하지만 그나마 여러 유적지를 통해 마한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주목할만한 유적지는 바로 신창동 유적지로 1962년 서울대학교 고고학팀이 53기의 옹관(독무덤)을 발굴하면서 처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신창동 유적은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곧바로 사적 제37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유적지가 저습지였기 때문입니다. 습지의 지하층은 완전 밀폐되어 공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유물을 갉아먹는 세균과 벌레가 서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일대에서는 155㎝ 두께의 벼껍질 압착층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벼를 재배한 밭과 논이 확인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밭벼였습니다. 이곳에서의 발견된 벼의 무게를 환산하면 500여 톤에 이르는 양으로 동북아시아 최대의 생산자료이며 당시 마한인들의 주식이 쌀을 비롯한 곡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창동 유적지는 영산강 유역 낮은 평야지대입니다. 그런데 1978년 나주 다시면 가흥리 영산강 유역 습지에서 화분을 채집하여 탄소측정연대를 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벼를 재배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작지가 아닌가 추측케 하며 따라서 영산상 유역 일대는 신석기 후기에 벼농사를 지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보다 앞선 벼농사 유적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한반도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기워전 10세기에 시작되었다는 통설과 비교하면 신석기 시대 후기에 이미 벼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이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역사적인 이야기지만 적어도 영산강 유역 일대의 한반도에 가장 이른 시기의 벼농사지대임은 틀림없습니다. 이곳에서는 나무로 만든 낫이 발견되었습니다. 철기사 사용되기 전의 모습으로 그래서 이러한 낫 사용으로 수확방법을 개선하고 재배면적을 확대시켰을 것입니다. 다만 신창동 유적지에서 발견된 벼 유물에서 개화 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아직 여물지 않은 쭉정이가 다량 발생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생산과정에서 획기적인 변화는 감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농경지 개간을 통해 생산량을 늘려나갔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괭이, 따비, 굴지구, 낫, 절구통 등은  수확과 곡물 가공에 사용된 농기구로 이같은 유물들이 동시에 발견된 것은 국내에서는 최초라고 합니다. 

신창동 유적의 수레바퀴통

여기서는 870여 점에 이르는 다양한 목기가 발견되었고 무기·농기류·공구·용기·제의구·방직구·악기·수레부속구·건축부재 및 기타 생활용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농공구의 자루와 수레바퀴, 불을 피웠던 발화대 등은 단단한 참나무가 사용되었고, 북은 울림이 좋은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제작되었다고 하니 제품에 따라 사용하는 나무의 재료를 달리 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수레바퀴까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한인은 소나 말을 탈 줄 몰랐다. 이에 반해 진한인은 소와 말을 타고 부릴 줄 알았다.’『후한서』
이러한 사료를 통해 보면 당시 마한인들이 주변 주역인 진한인에 비해 도구의 발달이 늦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수레바퀴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이 거짓이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수레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속구들이 들어가며 수레바퀴와 더불어 이 유적지에서는 바퀴통, 바퀴살, 가로걸이대(車衡) 등의 수레바퀴 부속구가 나왔습니다. 수레바퀴는 소나 말을 타고 이용하였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수레를 이용하기 위해 도로와 교통체계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력자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 1963년에 신창동식 옹관이라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유력세력은 해당 지역의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성장했을 것이며 도한 도로를 통해 수레에 물건을 싣고 주변 지역과 교역했을 것입니다. 

신창동 유적의 칠이 담긴 토기

당시 마한인들이 높은 기술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칠을 이용한 도장입니다. 칠은 옻나무의 몸통이나 줄기의 표층부에 상처를 내어 수액을 채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창동 유적에서는 내부에 칠이 담긴 출토되었고 이는 옻칠 수액을 보관하거나 칠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칠은 당시 첨단하이테크기술로 여겨졌으니 소나 말을 타고 다닐 줄 몰랐다는 『후한서』의 기록을 뛰어넘어 오히려 선진적이고 높은 기술을 가진 집단이 마한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낙랑과 비교해 볼 때 낙랑에서는 수레부속구를 금속을 사용한 것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목재를 사용하였으니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도 철제 대신 나무로 만든 농기구들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까지는 철제 도구에 대한 발달을 미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철제농기구를 이용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이를 통해 사회계층분화가 일어났어야 했지만 마한은 그 단계까지는 못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한인들은 양잠을 알고 옷감을 만들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이러한 사료를 뒷받침하는 유물도 발견되었습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직물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삼으로 짠 것이었고 또다른 것은 비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각뿐 아니라 옷감을 짜기 위해 실을 뽑는 가락바퀴와 실을 감는 실감개, 그리고 베를 촘촘하게 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바디 등도 출토되었습니다. 사실 인류가 언제부터 옷을 만들어 입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가락바퀴가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확인되었으며 이 때부터 직물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창동 유적에서 직물과 더불어 이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발견되었다는 것인 신창동 적어도 기원전 후 1세기 무렵에는 고대방직공장에 준하는 생산체계를 가지고 자체적으로 제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옷뿐만 아니라 신을 만들기 위한 제작된 신발골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라고 합니다. 『삼국지』의 기록에서는 ‘삼한 사람들은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는 유물의 발견되어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1997년 광주 광산구 신창동에서 출토된 현악기 유적

 "풍습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한다. 이때 사용하는 슬(瑟)은 그 모양이 축(筑)과 비슷하며, 이것을 타면 곡조가 나온다“ 『삼국지』
이러한 사료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기인 슬이 발굴되었습니다. 복원 결과 길이 77.2㎝, 폭 28.2㎝로 신라의 유물인 ‘토우가 달린 항아리’에서 확인된 가야금과 그 모양이 비슷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은 임당동(67㎝), 다호리(64㎝)의 것과 비슷하지만  낙랑 지역의 석암리에서 출토된 현악기는 길이가 110㎝이므로 악기를 통해 문화권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창동 유적지에서 발견된 슬은 벚나무로 제작되었으며 10현으로 추정되며 이와 함께 북과 찰음악기도 나왔습니다. 이러한 악기를 통해 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거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BC3∼4C 무렵 고조선에서 유행하였던 점토대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의 사람들이 고조선유이민이 남하한 것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영산강 상류지역에서는 한나라에서 사용된 반량전과 오수전, 신나라에서 사용된 화천 같은 화페가 발견되어 이미 한 군현과 교류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먹거리가 부족한 왜나 탐라와 교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영산강 일대의 세력은 백제나 마한 북부세력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한군현과 교류했을 것이며 그러한 문화교류와 생산력을 바탕으로 영산강 일대에서 그 힘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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