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국가들은 왜 죽막동에서 제사를 지냈나.
2022. 12. 5. 08:0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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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2년의 일이었습니다. 전북 부안군 격포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삼국시대의 제사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다량의 삼국시대 제사유물이 출토되어 학계의 관심을 끈 것입니다.
"개양할미[해신(海神)]는 키가 어찌나 큰지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을 메우고 위험한 곳을 표시해 어부들을 돌보고 고기를 많이 잡히게 했다."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은 서해안에 돌출된 해안절벽에 형성된 해식동굴 옆에 만들어졌습니다. 이곳은 백제 때부터 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제사가 이루어진 곳입니다. 이 유적지는 바다여신 개양 할미를 모신 곳으로 전설에 따르면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리며 이 곳을 지나는 선박과 어부들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개양할미는 바다의 신으로 여덟의 딸을 뒀는데 팔도에 각기 시집보내고 막내와 함께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개양할미는 나중에 수호신이 된 것이며 개양할미를 위해 혹은 바다의 신을 위해 백제 때부터 안전한 항해를 위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제당에서 해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현재도 열리고 있는 수성당제가 그것일 것입니다.
3세기 후반부터 제사를 시작한 이곳에서는 마한, 백제, 가야, 왜 토기 및 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백제 때부터 이어진 제사가 현대까지 이어지면서 제사를 지낸 후에는 제기를 땅에 묻었고 따라서 이곳에서 다양한 나라의 유물이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제사는 그 지방의 토착세력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는 흑유항아리나 중국제 청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물들은 서울 송파의 퐁납동 백제 왕성 유적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 올린 해양 제사는 국가적 제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청동방제경 그리고 머리가 부러진 토제 말들이 나왔는데 제사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옛날 중국에서는 이것들은 말이 바다의 신과 결합하여 용이 된다는 믿었다고 합니다. 아마 먼 거리를 갈 때 쓰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보이는 출토된 것 유물 중 왜의 것으로 보는 것도 춭토되었으니 그것은 오키노시마 출토 유물인 구멍뚫린 원판과 거리거울, 굽은 옥, 쇠칼 등을 본뜬 석조모조품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중국 동진시대의 네 귀가 달린 항아리 모양 청자사이호조각도 발굴되었으며 청동으로 만든 말안장 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방울, 말봉방울 등의 마구류와 철제투겁창, 쇠칼, 쇠단검, 화살촉 등의 무기류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시대인 보선의 분청사기, 백자의 도자기류도 발견되었으니 고대국가 시대 이래 근대까지의 유물을 품으며 현재까지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그럼 죽막동에서 제사를 지냈던 이유는 또 무엇이 있을까. 이곳은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주요거점이며 백제시기에는 가야와 왜에 선진문물을 이곳을 거쳐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어느 지점을 띠라 갔을 것이며 아마 죽막동도 그러한 지점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점 중하나인 이곳에서 주변국들은 제사를 지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곳에서 여러 나라가 함께 모여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다량의 백제 토기와 대가야의 유물, 그리고 왜에서 건너온 물건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죽막동은 풍랑이 거세기로 유명하므로 바닷길의 안녕을 빌기 위해 아마 이 길을 주로 애용하던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제사를 거행합니다. 따라서 아시아 대륙 동쪽 서해안에 위치해 한중일 삼국을 잇는 바다를 매개로 어업과 항해의 성공을 기원하는 제사가 이루어진 제사 유적지로 주막동은 그 가치가 있으며 기원후 3~9세기까지 증거가 그대로 남아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장소입니다. 그럼 여러 나라가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면 그 나라들 사이에 기본적으로 우호를 다졌을 것입니다.
지난 2020년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백제가 천도한 직후 만든 것으로 보이는 왕궁 관련 건물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유적발굴에 참여한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단순 귀족저택이나 민간건축으로는 보기 어려우며 왕과 관련된 부속시설이나 관청 건물로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발굴된 것은 대가야 토기였습니다. 그릇 뚜껑과 목이 긴 단지 파편 등으로 볼 때 제사나 행사 때 사용하는 그릇으로, 백제와 대가야의 국가 공식행사에 쓰였을 가능성이 커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유적지의 발굴 유적지의 조성 시기는 6세기 중반으로 부여에서 대가야 계통의 물건이 나왔다는 것은 대가야와 백제 사이의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친백제성향을 지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백제권역에서 가야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서울풍납토성에서 확인되었고 앞서 이야기한 죽막동 유적지에서도 나온 것입니다. 한편 이보다 앞선 2015년에는 고령군 대가야읍 주산성에서 백제의 축조기술이 적용된 가야 최초의 대형저장시설인 목곽고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적지에는 백제의 도량형이 적용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암반과 점토, 목판 등을 이용해 석축을 쌓는 등 방수와 온도 및 습도의 변화를 조절하는 특수 기능의 대형 목곽고가 산성정상에 조성된 것은 음식재료 등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한 저온 식자재 저장시설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이 목곽고가 축조된 6세기 중엽의 대가야는 백제와 연합하며 신라에 대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친백제성향을 띠고 있는 대가야의 유물에서 백제의 흔적을 확인할 수있습니다. 대가야 중심부에 백제 묘제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사적 제165호), 고아2동 고분, 절상천정총(折上天井塚·고령군 지산리 소재) 등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 축조된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급격하게 그 힘이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백제와 신라의 싸움에 대가야는 백제의 편에 서서 싸움에 참여했을 것이며 패배하면서 자연스레 힘이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죽막동에서 모여 제사를 지낼 정도면 대가야와 백제는 당시 어느 정도로 친밀했을까. 대가야는 낙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접하고 있었으므로 섬진강을 통해 중국의 남제와 교류를 하려 했습니다. 대가야가 전라도로 진출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2013년에 전북진안 장수군에서 가야계 돌덧널무덤이 드러났습니다. 4~6세기에 대가야는 6가야 중 그 세력이 강했고 신라와 대치되면서 백제와 우호관계를 다지며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대가야는 새로운 교통로로서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 지역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 당시 가야에 복속 당했는지 아니면 이 지역을 그저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만약 가야가 이곳으로 진출을 꽤 했다면 섬진강을 통해 죽막동으로 가는 길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대가야의 호남진출을 그냥 두었던 것일까.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대결에 힘을 쏟아야 했으므로 이를 묵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라북도 동부에 있는 이 지역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가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장수 일대에 가야의 영향권이 아닌 하나의 독립국가가 있었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대형고분이 200여기가 밀집되어 있는데 기존의 가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관의 부재인 꺾쇠는 왕실무덤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고대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곳에 있던 나라는 장수가야였을 수 있습니다. 여러 고대 국가들의 유물이 죽막동에서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수로교통의 중요성과 외교관계 그리고 문화의 교통로로서의 역할이 맞물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긴박했던 당시의 국제사정 속에서도 죽막동은 국제교류의 장이자 제사터로 당시 이곳에서 주변국들이 모여 안전한 항해를 도모하며 해신을 달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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