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속의 소금
2023. 5. 2. 08:2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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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아주 옛날부터 우리의 식탁 위에 올라온 재료인데요.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각종 질병의 근원이 지목되어 천덕꾸러기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소금에 대한 인식이 달랐습니다. 말 그대로 작은 금이라고 불린 것인데요. 소금은 금과 같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았으며 화폐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니 소금은 하얀 황금이기도 했습니다.
세계사에서 소금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동양에선 중국 산서성(山西省) 운성시(運城市) 해지(海池, Xiechi Lake)의 수면에서 BC 6천년 경 소금을 수확했습니다. 이전 동유럽의 전(前)쿠쿠테니문화의 신석기시대(Neolithic people of the Precucuteni Culture) 유물에서 BC 6천 50년에 해수를 끓어서 소금을 생산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BC 2천 800년경 이집트에서 페니키아인과 레바논 백향목(cedar), 유리 및 보라색 염료(dye purple)를 소금과 교역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소금에 대한 우리나라의 역사는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서도 나와 있는데요. 선사시대 사람들도 소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4대의 배 중 한 대가 고래를 잡아서 염장처리를 했던 소금배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구대 암각화 천정리 각석 등이 있는 ‘태화강 상류 대곡천의 물이 짰다’라는 증언과 기록이 있어 대곡천 인근에 있던 암염에서 소금을 채취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금이란 의미를 가진 소금 '鹽'자는 모두 세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른쪽 위의 '鹵'는 소금밭을 본떠 만든 글자입니다. 네모난 염전 안에 소금알갱이를 긁어모으는 모양입니다. 왼쪽 위의 '臣'은 잘 알다시피 관리를 뜻합니다. 이 글자는 본래 감시하는 눈 모양을 단순하게 표현한 상형문자로 마지막으로 아래의 '皿'은 소금을 담는 그릇을 뜻합니다. 따라서 소금 '鹽'자는 소금밭을 나라의 관리가 관장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금에 대한 우리나라 관련 기록으로 『후한서』'의 동이열전 중 '동옥저조'를 보면 동옥저가 고구려에 바친 세금 중 어염이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소금은 국내 유명한 고대 장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요. 6세기 고구려, 한 마을에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소년이 소금장수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의 힘이 장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소년을 놀렸고,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뛰어 놀지 못하고 일하는 것에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괜찮다며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그 후 소금 파는 일을 계속해 16살이 됐습니다. 소년은 어느 날 소금을 팔기 위해 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가게 됐습니다. 하지만 소금은 많이 팔지 못했고,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소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소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소년은 소의 사체를 가져가 주인을 찾아주기로 했습니다. 소를 업고 마당에 놓아놓았다는 소년, 알고 보니 소년이 잡은 것은 소가 아니라 호랑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가죽을 사겠다며 북새통을 이뤘고, 큰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소년은 돈을 어머니께 건넸고, 어머니는 집으로 오는 중 칼 한 자루를 사 소년에게 건넸습니다. 그리곤 어머니는 아이에게 "넌 무예를 해라. 넌 소금을 팔 아이가 아니다"라며 "훌륭한 장수가 되라" 권한 것입니다. 이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예를 연마한 그는 결국 고구려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을지문덕 장군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어린 시절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을지문덕의 고향으로 알려진 평안남도에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제15대 왕인 미천왕은 삼촌인 14대 봉상왕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소금 장수가 되어 훗날을 기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고구려 14대왕 미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을불'이라는 이름으로 살 당시 등짐을 지고 다니며 소금을 팔았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소금 전매제가 도입된 것은 고려 초. 고려 태조가 도염원을 설치하고 세금을 통해 재정수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고려 말기에야 비로소 정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소금을 전매한 임금은 충렬왕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원나라의 사위가 되기도 했는데 부친 사후 귀국해 왕위에 오른 그가 권력기반 및 경제기반 강화를 위해 실시한 것이 소금 전매제였습니다. 당시 권문세가들이 소금가마를 탈점해 국가 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는 그가 원나라에 볼모로 있을 때 배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대대로 이 소금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세종은 즉위 후부터 7년간이나 극심한 가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굶주린 백성을 위한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쓰인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그 결과 세종 27년(1445년) 일종의 소금 전매 기능을 가진 ‘의염색’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1592∼1598년) 후 헐벗은 백성을 보다 못한 명재상 유성룡은 소금에 관심을 가졌고 소금생산을 장려하고자 염철사(소금담당 관리)제도를 도입해 전국에 파견하였습니다. 한편 소금과 관련하여 조선의 제 15대 왕인 광해군은 왕자시절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묻는 선조에게 ‘소금’이라고 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러던 조선 후기 정약용은 소금에 대해 이러한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 적어 넣었습니다.
‘무릇 소금은 백성이 늘 먹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오곡이 있어도 맨밥을 먹을 수는 없고 비록 여러 가지 나물이 있어도 나물을 그냥 절일 수는 없다. (…) 백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이미 간절하니 국가의 권장이 당연히 후(厚)하여야 할 터인데, 한(漢) 나라 이후로부터 소금에 대한 행정을 까다롭게 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였다.’
정약용은 소금을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식품으로 보았는데 국가는 이를 독점해 이익을 남기려 한 것은 꼬집은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 땅에서 소금으로 이득을 챙겼습니다. 1907년, 인천 주안에는 천일염 시험장이 건설되었습니다. 일본은 바람과 햇볕으로 소금을 생산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본 조선인들은 놀랐습니다. 수천 년간 조선 땅에서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천일염이 처음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이를 `왜염’이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갯벌에 바닷물을 가둔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말려 소금을 얻는 천일염을 전통적인 소금이라고 알고 있지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전통 소금은 자염입니다. 일제는 한반도를 소금 공급기지로 삼기 위해 전통적인 자염 대신에 제조가 쉬운 천일염으로 생산방식을 개편했습니다.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제에게 소금은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습니다. 염화나트륨 함유량이 높은 천일염은 화학공업과 무기산업의 원료가 되었습니다. 이후 궁내부에 소속되어 왕실의 금고로 들어가던 소금세는 국가의 금고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일제는 이 소금세를 많이 매겨 염세 규정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제에게 천일염전을 세울 권리를 허가하고 소금세를 걷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제는 조선의 소금을 독점해 갔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전통 소금제조방식인 자염법은 가마솥에서 바닷물이나 농축된 소금물을 끊여서 자염(煮鹽)을 생산한 것으로 자염법은 갯벌을 뒤집어 짠흙을 생성하기 위해 힘센 소를 필요로 하며,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구워야 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했습니다. 쇠솥에 끓일 때는 특히 소나무가 주로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조선 때부터 소금 생산이 많은 서해안에는 소나무 남벌을 막는 금송(禁松) 정책이 자주 취해지기도 했습니다. 자염은 값이 비쌌고, 국내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자염은 연료 소비가 적은 천일제염에 자리를 내주면서 1950년쯤 명맥이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서해안에서 50년 만에 자염을 생산하는 영농조합이 생겨나면서 전통방식의 자염이 복원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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