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영산강 정치세력은 옹관묘를 썼다.
2022. 12. 6. 08:0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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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관은 항아리나 2개의 독을 맞붙여서 만든 관을 말합니다. 옹관의 길이는 190cm, 그리고 연결하면 그 길이가 2m를 넘습니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주로 어린아이의 매장시설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옹관은 중국, 베트남, 일본 등 세계적으로 다 있었던 것으로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는 다른 지역에 비해 크기가 크다고 합니다. 특히 이 지역의 옹관은 5~6세기가 되면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U'자 형의 대형 옹관을 제작합니다. 대형옹관은 왜 나타난 것일까. 다른 고대국가들, 삼국시대의 목관묘나 고구려나 백제의 석실묘가 아니었습니다. 옹관은 흙은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안에 독을 안치한 것으로 무덤을 추가할 때는 언덕의 바로 옆쪽이나 위쪽에 흙을 다시 쌓아 같은 절차를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옹관묘는 영산강 지역에 집중 분포되었습니다. 이렇게 대형옹관이 만들어진 데에는 시체를 잘 보존하기 위해 썩지 않는 관을 만들려했다는 견해와 더불어 재생과 부활을 기원하기 위해알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을 것, 그리고 옹관의 목 주변을 둘러 장식한 톱니바퀴 무늬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재생과 부활을 의미로 보기도 하지만 결국 이것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없습니다. 다만 고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묘제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영산강 유역에 있는 옹관묘는 토기를 소재로 하는 무덤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보고 있습니다. 고대국가가 만들어지면서 국가형성 과정에서 옹관이 급속도로 확산되며 대형화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리고 이를 통해 백제의 구분되는 정치세력이 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주 반남고분군은 5~6세기의 옹관구분군인데 40여기의 구분들이 분포되었습니다. 아마 지역지배층들이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무덤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금동관모,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춭토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다른 지역의 옹관에서는 발견할 수 없던 것입니다. 다른 지역의 옹관에는 권력자를 한 묘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청동기시대나 삼국시대의 옹관은 1미터를 넘는 경우가 드문데 이 지역의 옹관이 대형화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 지역에 대해서는 백제에 통합된 마한세력의 일부로 보고 있지만 국내문헌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실체를 알기 힘듭니다.
‘동이 마한 신미 제국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유주와의 거리가 4천여리였는데 역대로 내부하지 않던 20여 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왔다.’ 『진서』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으로 되어 있었는데 영산강 지역에는 아마 13~14개의 소국이 자리 잡고 있던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이들 중에 신미국이 중심이 되어 연합체를 형성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기존에서 4세기 근초고왕 대에는 영산강 일대까지 지배한 것으로 보였는데 6세기 대의 옹관이 발견됨으로써 학자들이 갸우뚱했습니다. 왜냐하면 근초고왕 대에 이 지역을 장악했다면 백제 계열의 문화가 나타나야 하고 그러면 이 지역의 문화가 단절되거나 규제되었어야 하는데 3세기의 대형옹관묘가 단절되지 않고 발견된 것입니다.
1996년에 발견된 나주 복암리고분군은 그 원형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는데 41기의 유구가 확인된 복암리 3호분은 3세기에서 7세기까지 4백 여년간 사용된 추가장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목관, 옹관, 석실, 석곽 등 7가지의 종류의 묘제가 발견된 것입니다. 옹관이 추가되며 사다리꼴의 모습을 보였는데 이후 고분들이 합쳐져 방형으로 통합되고 여기에 석실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위에 흙을 쌓아 매장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석실은 백제의 대표적인 묘제로 이 곳에서도 확인된 것입니다. 그럼 석실묘는 백제인이었을까. 아니면 토착세력이었을까. 조사 결과 석실들은 5세기말 6세기 초에는 백제와 무관한 것으로 보았고 6세기 중엽부터 축조된 석실이 백제와의 관련있다고 보았습니다. 유물에서도 백제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는데 기존의 근초고왕 마한통합설과는 대치되는 것입니다. 가령 중간에 구멍이 뚫린 토기나 양이호같은 토기의 발견은 이 곳 지역의 특색이었습니다. 즉, 백제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이 이곳에 위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0㎏~300㎏, 2m가 넘는 옹관은 고대에서 어떻게 만들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알아낸 것은 구운 온도가 800-900도 정도로 다른 토기나 도기류에 비해 소성(燒成) 온도가 낮은 편이며 사립(沙砬) 즉, 모래 성분이 상당히 많다는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쓰인 흙은 영산강 일대의 흙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넓은 평야에서 퇴적물이 많았고 이러한 성질이 옹관제작에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옹관에서는 20%가량의 석영과 장석의 비짐이 확인되었습니다. 비짐이란 토기의 몸체 자체는 약하게 하지만 염토의 끈기를 낮춰서 만들기에 좋도록 하며, 말릴 때 수분이 달아나는 것을 돕고, 그릇을 구울 때 뒤틀리거나 지나치게 수축하는 것을 막고 용융점을 낮춰주는 등의 역할을 하도록 염토에 일부러 집어넣는 물질을 말합니다. 이러한 비짐은 대형옹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짐이 첨가되면 다량의 공극들을 마듭니다. 옹관의 무게를 전체적으로 감소시키고 대형옹관의 두꺼움을 유지하는 동시에 소성과 건조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결함가능성을 낮추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랜 경험과 시행 착오 속에서 만든 당시로서는 최담기술이었습니다.
2001년에 발견된 나주 오량동 도요지는 영산강 유역에서 옹관묘 가운데 가장 잘 발달한 U자형 전용옹관을 생산한 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많은 옹관조각이 발견되었고 총 60개의 가마가 확인된 가운데 추가발굴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이 곳에서 점토의 제작, 옹관을 구운 다음 만든 옹관을 각 지역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500여기의 옹관을 생산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남지역의 대부분의 옹관은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산강을 이용한 교통로를 이용하여 옹관은 배나 뗏목에 실려 각 지역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수로를 중심으로 고분군이 형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만든 옹관은 이러한 가마터가 발견되기 전에는 돔과 같은 가마터를 상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통방식의 살가마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옹관은 만들기 어려우므로 특정계층들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3세기의 옹관은 일반그릇에 가까운 형태였는데 이후 목이 퇴화되고 관에 적합한 U자형 옹관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한성백제에서도 영산강 유적에서 발견된 초기 모습의 옹관과 비슷했습니다. 제사용으로 쓰인 것인데 이후 매장용기로 바뀌면서 대형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로 쓰이던 것이 피장자의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에 쓰이던 것을 장례용으로 사용함으로써 피장자에 대한 예를 표하고 여타 피지배계층에게 그 위세를 과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로도 무덤의 주인의 세력을 알 수 있습니다. 영동리 고분은 지름 10m 이상의 봉분이 있으며 복암리 고분처럼 아파트형태의 추가장이었습니다. 영동리 고분에서도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다양한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기 다른 무덤에서 가족의 인골들이 발견되었으니 혈연을 매개로 한 공동체사회가 유지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암리 고분에 비해 그 규모가 작고 복암리고분에 발견된 금동관이나 화려한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복암리 고분은 최고의 지배자격이고 영동리 고분은 그 아래있던 전문계층집단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정치적으로 세분화가 되어있던 사회였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이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14기 정도가 있는데 이러한 일본양식의 무덤과 토기의 발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그 기간 동안은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는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세기 후반 이러한 옹관고분은 없어지고 백제식의 석실묘가 나타났으니 이 시기부터는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통치하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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