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 금제띠고리의 발견, 낙랑은 어디 있었나.
2022. 12. 2. 07:5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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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분에서 발견된 금제띠고리는 기원후 1~2세기의 낙랑의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버클 판에 금실과 금 알갱이로 엮어 만든 용 1마리와 작은 용 6마리가 새겨져 있는 이 유물의 가장 자리는 금실로 꼬아서 마감하였습니다. 길이 9.4㎝, 너비 6.4㎝인 이 허리띠 고리의 화려한 장식과 뛰어난 제작기술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유물에 대해 제작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학계에서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후에 한반도로 유입되었거나 평양을 지배하던 낙랑군이 흉노계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아 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 석암리 금제띠고리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용 일곱 마리의 눈에서 모두 적색물질이 감입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특정물질을 박아 넣은 것인데 기존에는 작은 용 한 마리에만 적색물질이 알려져 있었지만 2016년의 조사결과로 모든 용의 눈을 붉게 장식한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적색 안료에 대해서는 진사로 추정하고 있으며 진사는 주로 회화에서 칠할 때 사용하는 물질로 금세공품에 감입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금세공품에 진사를 감입하는 기법은 주로 백제 유물에서 확인되며 공주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귀걸이, 환도대도, 도재, 금모 장식과 익산미륵사지 금제사리봉영기, 곡옥의 금옥 장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이러한 연구를 내면서도 이 유물과 백제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쉽사리 단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제인이 구현한 금속공예술의 뿌리를 유추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편 평양낙랑토성에서는 기와가 발견되었고 평양 일대에서는 기원전 1세기 대의 낙랑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물의 발견은 한국 고대사의 여전히 뜨거운 감자중의 하나이니 그것은 한반도에 낙랑군이 존재했는가 과연 낙랑은 어디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낙랑은 평양에 있었는가.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평양설에 대해 일제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이 주장되어온 것이라며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낙랑군의 평양설치설은 일본학자가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7세기 이익이 요동설을 주장한 이후 17세기 한백겸, 18.19세기에는 유득공, 정약용, 한진서가 낙랑의 중심지를 평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안정복은 『동사강목』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낙랑의 교치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낙랑군 평양설이 과연 식민사학이라는 점에서는 재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될 때까지 400여 년이 넘게 존속하였으나 일제 때는 일본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낙랑의 지배층을 한족, 피지배층을 고조선계 토착민, 그리고 중국학계에서도 낙랑을 중국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한국식 동검인 세형동검과 인구호구조사를 기록한 목간의 연구성과를 통해 낙랑의 지배층 상당수가 고조선계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사료를 근거로 낙랑요서설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낙랑군 조선현이 낙랑군이 멸망한 뒤 일부 유민이 요서로 옮겨간 상황을 적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지배자 모용외가 유민에게 낙랑군을 만들어주고 낙랑태수란 관직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낙랑의 평양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평양에서 낙랑의 유물이 꾸준히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일제강점기 때에 이 지역의 유물은 일본 학자들은 초기의 고구려의 것으로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중국계 유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백동 1호분에서는 ‘부조예군(夫租薉君)’이란 예족군장이 나왔는데 부조는 낙랑군의 속현 중 하나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또한 ‘초원 4년 현별 호구부’는 1993년 평양의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것인데 낙랑군에 속한 속현의 호구수를 기록한 죽간입니다. 이 유물이 평양에서 출토됨에 따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예의 위치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 진한... 동쪽은 큰 바다, 서쪽은 낙랑”, “마한의 북쪽이 낙랑이고, 남쪽은 왜”『후한서』
이러한 기록은 낙랑이 평양에 있었던 것은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기록만으로는 가능성만 생각할 뿐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낙랑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야아 할까. 현재 이 낙랑에 대해서는 중국인에 의해 운영된 중국인 사회라는 통념이 깨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근거는 낙랑군이 420여 년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이며 한나라인의 강압적인 지배가 문제가 되었다면 그 기간 동안 유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낙랑군이 중국의 선진문화가 유입되는 통로로 보고 이를 통해 삼한과 일본으로 펴져나갔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랑군 평양설을 반대하는 사학자는 중국 고대자료에서 왕검성과 평양이나 대동강 남쪽에 있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중국 학계 또한 험독현의 위치를 랴오닝 성 서부에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반도설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사관에 대한 극단적인 추종자세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낙랑의 유물이라고 하는 석안리 무덤에 유물에 대해서 보고가 나왔습니다. 발굴 당시 세키노 다다시 등 이론 학자들은 출토품을 한나라 중원 유물로 보았고 무덤의 주인도 중원에서 파견된 식민지배자로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술을 담는 용기인 청동온주전자나 대모 장식 등 부장품 상당수가 중국 광시성·광둥성이나 베트남 등 중원 남쪽에서 온 유물이었고 여기서 발견된 금제띠고리는 중국중원에서 발견된 적이 없고 서역의 신장이나 내몽골 지역에서 사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유물 자체는 북방 유목민의 전형적인 공예특징을 보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물건은 낙랑이 자체적인 교역로를 통해 이러한 물건을 들여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실제로 그것을 의심할 만한 것이 당시 이러한 유물들을 발견한 일본학자들은 낙랑은 곧 한나라이고 조선 또한 한의 강역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한반도는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그러한 것을 일본이 해방시켜주었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한나라의 사민정책입니다. 다수의 한나라인들이 황해도로 흘러들어왔고 그들의 생활터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낙랑군평양설을 부정하는 쪽에서는 일본이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한 대의 도굴품을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습니다. 어쩌면 한나라는 고조선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한나라 백성들을 이곳으로 보냈는데 오히려 이곳에 살고 있던 고조선 토착민들에게 융화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낙랑군은 과연 평양에 있기는 했던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의이한 것은 낙랑의 대표적 묘제라고 하는 귀틀묘입니다. 귀틀은 나무로 짜놓은 틀을 말하는데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귀틀 곽을 짠 후, 그 속에 관과 부장품을 넣은 사각형의 봉분을 말합니다. 기원후 1세기 때 이 묘가 막상 중국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천문현상을 토대로 볼 때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고 오히려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합니다.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자주 영토를 침범해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시기의 기록은 낙랑이라는 나라가 과연 대동강 유역에 있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을 다 제끼더라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한나라가 기원후 8년에 멸망했는데 낙랑군이 313년에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다는 입장에서는 적절한 언급조차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서 발견된 낙랑유물은 한사군이 아닌 최리의 낙랑국인 것으로 보아야 하며 후한의 광무제가 이 지역을 치고 설치한 군현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낙랑은 어디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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