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고단했던 농민들의 삶
2022. 7. 26. 21:1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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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농사는 중요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농사는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 중기인 기원전 3000년 경부터 행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초창기의 농사는 나무나 잡초를 베거나 불로 태운 다음 밭을 만들어 농사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당시 농경모습을 알려주는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농경문 청동기입니다. 이랑과 고랑이 표시되어 있고 밭을 가는 사람과 흙을 고르는 사람이 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더불어 청동기시대에는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됐고 농경을 통해 부가 축적된 것을 보여주는 거대한 곡물저장소도 발견되었습니다. 이전시대에 비해 농사는 분명 발전했지만 아직 금속을 농기구를 사용하던 시기는 아니었는지라 땅을 깊이 갈 수는 없었고 거름 주는 법도 미약했습니다. 그리고 땅의 양분을 주고 나면 땅의 회복되는 데 휴식기를 주어야 했는데 길면 10년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철제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상황은 많이 나아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국이 건국된 것은 기원전 후입니다. 철제 농기구가 보급이 이루어져 생산력이 증대된 것은 4세기에서 5세기경, 철제농기구가 보편화된 것은 6세기경이었으며 이 시기에 우경이 확대되어 농업생산력이 확대되었으니 초기철기국가시대에는 농민의 삶은 녹록치 않았을 것입니다.
초기 고대국가의 백성들은 다른 국가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하나로 뭉쳐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족국가가 형성하게 되었고 여기서 지도자는 고대국가사회에서 귀족으로 편입하게 됩니다. 귀족은 자신들의 땅과 노비가 있었고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면 노비와 토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귀족은 재산증대 방법은 이뿐만이 아니습니다. 고리대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였는데 빈곤했던 농민이 쌀을 갚지 못하면 귀족의 노비가 되어야 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귀족과 농민이 가진 토지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족은 더 좋은 토지와 철제 농기구를 가지고 있었고 소를 이용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농사법을 통해 농산물을 생산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귀족은 말 그대로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을 했을 것이지만 농민들의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농민들은 여전히 돌이나 나무로 된 농기구를 이용하여 척박한 토지를 일구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시기에도 거름주는 방법이 그렇게 발달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농사로 인해 힘을 잃은 토지의 힘을 회복하는 동안 살아가기 위해 귀족에게 돈을 빌렸으며 토지가 지력을 회복하고 나서도 척박한 토지에서의 농업생산은 상대적으로 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리대를 갚지 못하면 귀족에게 척박한 토지마저 빼앗기고 그들의 노비가 되었습니다.
당시 땅을 갈 때 중요한 농기구로 따비와 쟁기가 있었습니다. 따비는 처음에 그 모양이 외날이나 코끼리 이빨과 비슷했으나 U자 형태로 변화했습니다. 4세기 들어서면서 철제농기구가 보급되고 6세기에 철제농기구의 보편화와 우경이 확대되면서 사정은 나아졌습니다. 한 때 철제농기구의 부의 상징이자 권력자의 전유물이어서 지위가 높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철제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철제농기구가 가지고 있던 위상은 달라졌고 따라서 6세기 이후의 무덤에서 철제농기구가 출토되는 경우도 적어졌습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철제농기구의 양이 적어진 만큼 철제농기구의 보편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월,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았다.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 삼국사기 -
기록에서는 신라에서는 지증왕 때에 처음 우경을 시작한 것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우경이란 말은 소를 이용한 밭갈이인데 그 이전에는 쟁기나 보습과 같은 농기구로 밭갈이하였습니다. 일단 소가 대체적으로 500kg에 달하는 체중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과 확연히 다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를 이용한 밭갈이는 단순히 사람의 힘을 소로 대체했다 수준이 아닌 것입니다. 전화만 있던 섬에 컴퓨터를 보급하고 인터넷을 설치한 정도의 혁신적인 변화였을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지증왕이 행한 업적은 바로 순장을 금지한 것입니다. 농업사회에서 노동력은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순장을 통해 노동력이 소실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을 넘어서 노동력이 근간이 되는 고대 농업국가에서는 발전을 저해하는 악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 벼농사를 지은 흔적은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들 유적지에서 불탄 볍씨와 토기 바닥에나 몸통에 볍씨자국이 찍혀있는 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들어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논은 쟁기를 들일 만큼 넓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의 풍속도를 보면 마을단위로 논을 경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혼자서도 관리가 가능한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당시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저수지나 보같은 인공관개가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논면적이 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논갈이 도구도 삽이나 괭이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벼농사는 밭농사에 비해 인기가 많았습니다. 쌀이 보리보다 장점이 많았는데 같은 크기의 땅에서 벼의 수확량이 보리보다 많았고 보관기간도 길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여건상 밭농사가 여전히 논보다 많았으며 이유는 그만큼 제약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때 벼농사가 본격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밭농사가 우위에 있던 사회였고 그와 더불어 수렵을 통한 생산 활동을 이루지 것입니다. 논농사가 인기 많았다고 하지만 쌀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고 16세기가 들어서면서부터 하층민들도 쌀을 주식으로 삼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는 어떻게 했을까요. 초기에는 손으로 일일이 땄을 것입니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 반달돌칼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하나 따는 수준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수확이 마치기도 전에 이삭이 떨어져버리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미리 따놓으면 말리는데 시간을 들여야 했고 말리는 도중에 썩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밑동을 한꺼번에 베어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낫이 등장하면서 사정은 나아졌습니다. 이러한 낫이 일반화된 것은 3세기후반입니다. 삼한, 삼국시대에 출토되는 농기구류 중에서 상당부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쇠낫이라고 합니다. 이 낫으로 벼 밑동을 치고 나면 볏짚은 가축의 사료나 땔감으로 쓰이고 혹은 퇴비를 만들거나 짚신이나 바닥깔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볏집을 엮어 초가지붕을 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벼는 창고에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가난하여 품을 팔며 어머니를 간신히 모시며 살아왔습니다. 헌데 올해는 흉년이 너무 극심해 품을 팔 곳도 찾을 수 없고 곡식을 구하기도 어려워 어찌 어머니를 봉양할까 걱정이 되어 울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서기 194년 고국천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슬피 우는 사람을 보고 그에게 우는 이유를 물으니 들은 대답이었습니다. 왕은 이를 위로 하여 옷과 먹을 것을 주었으며 당시 을파소를 불러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진대법라고 합니다. 진대법을 통해 일반 백성의 삶은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 일화를 통해 당시 고단했던 백성들의 삶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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