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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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공노비 해방
순조 원년(1801) 정월에 단행된 내시노비 해방은 16세기 이래 진행되어 온 공노비제도의 동요 현상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지만, 이는 1894년 노비제 폐지로 마무리되는 19세기 노비제 해체의 역사의 단초를 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때 내노비 36,974명과 시노비(각사노비) 29,093명 등 도합 66,067명의 내시노비가 해방되었습니다. 내시노비가 공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조선 후기의 실정을 감안하면, 내시노비 혁파는 사실상 공노비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조치에서 제외된 각관노비도 지방 관아의 공역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비조차 확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크게 줄어 들고 있었습니다. 내시노비 해방의 결과 19세기 노비제는 내부..
2024.03.26 -
제주도를 구한 여인 김만덕
김만덕은 1739년, 제주 성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본디 양인이었으나 부모를 잃고 12세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김만덕은 외삼촌 집으로 가서 일하며 겨우 목숨을 이었는데, 외삼촌이 죽자 외숙모에게 매일 중노동에 학대를 당하다가 부자 제주 기생 월중선에게 돈 몇 푼에 팔려갔습니다. 월중선은 한눈에 어린 김만덕의 훤칠한 미모와 단정한 성품이 마음에 들어 기녀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기생은 국가에서 소속된 공노비로서 관아의 재산으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김만덕은 퇴기의 수양딸이 되면서 생계는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김만덕은 예능적 재능을 발휘하여 제주에서 부와 명성을 떨쳤습니다. 『감은편』에 따르면 "자색이 있어서 부에 속한 기생으로 뽑혔고 기예를 배울 때 무엇이나 다 잘했다"고 김만덕의 미..
2024.03.19 -
단원 김홍도
김홍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한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대표할만한 예술가라 할 수 있습니다. ‘고금의 화가들은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는 못하였다. 단원은 못하는 게 없어 그와 대항할 사람이 없었다.’ 『표암유고』 단원기 김홍도의 출생연도와 고향은 분명하지 않으나 경기도 안산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 당대 최고의 화가 강세황이 살았으며 이집에 김홍도가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화서 화원이 김응환이 강세황을 찾아왔습니. 도화서에 일손에 부족하여 후배로 가르치며 데리고 있을만한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세황이 그림 몇 점을 보여주니 오히려 김응환은 자신이 가르칠 수준이 ..
2024.03.09 -
광암 이벽
이벽(李蘗, 1754년~1785년)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이며 이승훈, 권일신등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입니다. 1754년 경기도 포천의 기호학파 남인 집안에서 부친 이부만(李簿萬:1727~1817)과 청주 한씨 사이에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벽의 집안은 대대로 문인이었으나 조부 때부터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 집안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벽의 형과 동생은 무과에 합격하여 황해병마절도사와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으나 이벽은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벽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다산은 젊은 시절부터 30여 년에 걸쳐 유학경전에 대한 연구서인 『중용강의보』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벽의 도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벽은 다산 형제에게 몇 권을..
2024.02.26 -
삼전도비를 쓴 이경석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로 1639년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이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어 세운 비석입니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도중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혔다가 일제강점기 때 다시 세워졌으며, 광복 후 주민들에 의해 매립됐다가 1963년 홍수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삼전도비는 송파구 안에서 이전을 거듭하다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현 위치에 세워졌으나, 2007년 2월 삼전도비 철거를 주장하는 백모 씨가 붉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철거 370'이라는 글자를 적는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이경석은 조선 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할아버지는 이수광(李秀光)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
2024.02.09 -
소현세자빈 강씨
강빈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장남이었던 소현세자의 세자빈이었습니다. 강빈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건 1627년(인조 5년), 17살 되던 해였습니다. 하지만 강빈은 세자빈으로 간택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1625년(인조 3년) 소현세자의 책봉례가 거행되는 시기에 맞춰 파평 윤씨 윤의립의 딸과 가례를 추진했습니다. 소현세자보다 1살 어린 여자였으나 중심들은 ‘윤의립의 서조카 윤인발이 이괄의 난에 가담한 역적이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강빈이 소현세자와 가례를 치른 1627년(인조 5년)은 정묘호란이 발생하였습니다. 1월에 후금이 10만 명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침략하자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고, 16세의 소현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습니다. 후금과 '형제의 맹약..
2024.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