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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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상처의 역사 일본군 위안부
1992년부터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이면 이어지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 횟수는 1000회를 넘기며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집회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우리가 기억해야할 지울 수 없는 상처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당했던 정신대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중 정의기억연대 소속 할머니들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일본군 ‘위안부’문제입니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으로 정신대, 군위안부, 혹은 종군위안부라고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에 대..
2023.04.15 -
안중근의 가묘만 있는 이유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안태훈이고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할아버지는 미곡상을 운영하여 집안이 부유하였고 안태훈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시 안중근의 집에 머물고 있던 백범 김구는 『백범 일지』에서 소년 안중근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큰아들이 중근으로 그 때 나이 열여섯살이었는데 상투를 틀고 자주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동방총(메고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장총의 일종)을 메고는 날마다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사냥 다니는 것을 일로 삼았다. 사냥할 때도 나는 새, 달리..
2023.04.14 -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5월 3일 만주에 설립되었던 독립군 양성학교로 이회영, 이동녕 등이 1911년 6월 10일 만주 삼원보에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이 나중에 만주, 간도 일대에서의 무장 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기준으로 졸업생이 3500여 명이 되었으며 신팔균, 이범석, 지청천 등이 이곳에서 교관을 맡았으며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설립에 큰 힘이 되어주던 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은 1910년에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만주로 건너간 이회영은 같이 따라온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이제 당신들은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라 하였습니다. 이들 이회영의 가족은 이항복의 후예로 그..
2023.04.10 -
무장독립운동사의 최대 승리 청산리 전투
1920년 봉오동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참패 이후 일제는 다시 심기일전을 합니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을 최강이라 생각해왔는데 봉오동전투의 패배로 자신들의 명성에 금이 생긴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에게 당한 패배라 일제는 이를 더욱 막고자 했고 독립군의 세력이 커진다면 이것이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제가 세운 정책은 ‘간도지방 불령선인토벌계획’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불령선인이란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을 의미하는 단어로 일본군이 만주로 진격하여 독립군을 직접 처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만주군벌인 장작림의 동의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장작림의 부하 중에는 일제의 이러한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배경..
2023.01.21 -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승리 봉오동 전투
19세기 후반에 일어서 우리나라는 외국의 침탈에 무방비상태였고 결국 1910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애국지사들의 독립활동은 국내에서 예전처럼 활발히 할 수 없었던 바 이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독립에 대한 활동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에 대한 기운을 키우고 자치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는가 한편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들을 양성하던 즈음인 1919년에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전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만주와 연해주에 있던 독립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국내로 잠입하여 일본군과 경찰서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일본..
2023.01.19 -
김원봉과 의열단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중에 무력으로 투쟁을 벌인 단체도 있었으며 그러한 단체에는 의열단이 있었고 의열단을 이끄는 단장은 김원봉이었습니다. 일제는 김원봉에게 독립운동가 중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습니다. 김구가 현금 60만원 (약 200억원)의 현상금을 걸렸는데 김원봉에게는 현금 100만원(약 300억원)을 내건 것입니다. 김원봉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보통학교에 편입하였습니다. 하지만 1911년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나눠준 일장기를 학교변소에 버렸고 이로 인해 김원봉은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이후 동화중학에 편입한 김원봉은 학교가 일제에 의해 사라지자 표충사라는 절에 머물며..
2023.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