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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이자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동생입니다.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로 본래 궁녀였던 양씨가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았습니다. 양씨의 친정 오빠는 백정 출신으로 조선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여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는 출세를 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졌지만, 덕혜옹주는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한 이후에 1912년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황녀였던 적은 없지만, 언론에서는 종종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59세에 얻은 늦둥이여서 유독 총애를 얻었다고 합니다. 고종이 아기였던 덕혜옹주를 보기 위해 입실했을 때, 마침 유모 변복동 상궁은 누워서 덕혜옹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습니다. 예를 갖추기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2024.02.06 -
베트남으로 간 조선인 조완벽
역사상에서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꽤나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수도에서 우리 조상들은 베트남 사신들을 마주칠 때면 양국 사신 모두 한자에 능숙하고 한시(漢詩) 등 중국 문화에 통달했던 만큼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도 꽤 깊은 교류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 이수광은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일본 배의 선원이 돼 베트남을 방문했다는 조완벽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놀랍게도 베트남에서의 이수광 자신이 유명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조완벽이 일본 상선을 타고 베트남에 갔는데 베트남 관리가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이수광을 알겠지?하고 묻더랍니다. 그런데 조완벽은 어렸을 때 일본의 포로가 돼서 이수광을 모른다고 하니 베트남 사람들 전부가 말이..
2024.02.03 -
발해 문왕
1980년 중국 지린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한 무덤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792년 6월에 36세로, 아버지였던 왕보다 먼저 사망한 발해 정효공주입니다. 그녀는 문왕의 넷째 딸입니다. 여기서 묘지석이 하나 출토됐습니다. 700여 자의 글자 중 491자 만이 식별이 가능합니다.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정효공주의 아버지는 바로 ‘대흥’ 그리고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발해 3대왕 문왕입니다. 당시 중국의 황제만이 쓰는 연호를 발해도 독자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발해 문왕은 당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당당히 황제국가라고 외친 것입니다. 발해는 당의 3성 6부라는 중앙제도를 받아들여 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중심이 돼 그 아래에 좌사정과 우사..
2024.01.29 -
발해 무왕
발해는 2대 왕은 무왕으로 대조영의 장남이자 건국한 지 불과 30여 년밖에 안 되는 신생국가 발해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의미 있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발해가 당나라를 선제 공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는 동서무역을 통해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발해는 당나라를 침공한 것일까. 무왕 대무예에게는 동생 대문예가 있었습니다. 대무예는 대문예에게 흑수말갈을 치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당나라를 친다는 것은 대문예는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흑수말갈을 치면 당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패배를 우려한 대문예는 무왕에게 다시 생각할 것을 권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동생은 자신의 뜻이..
2024.01.26 -
소현세자빈 강씨
강빈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장남이었던 소현세자의 세자빈이었습니다. 강빈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건 1627년(인조 5년), 17살 되던 해였습니다. 하지만 강빈은 세자빈으로 간택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1625년(인조 3년) 소현세자의 책봉례가 거행되는 시기에 맞춰 파평 윤씨 윤의립의 딸과 가례를 추진했습니다. 소현세자보다 1살 어린 여자였으나 중심들은 ‘윤의립의 서조카 윤인발이 이괄의 난에 가담한 역적이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강빈이 소현세자와 가례를 치른 1627년(인조 5년)은 정묘호란이 발생하였습니다. 1월에 후금이 10만 명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침략하자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고, 16세의 소현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습니다. 후금과 '형제의 맹약..
2024.01.23 -
독립운동가 최재형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습니다.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제 1호 법정에서 연일 안중근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끝내 일본은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안중근은 모두 혼자 꾸민 일이며 자금도 빌려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중근은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숨겨야 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최재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나서 광복절을 하루 앞둔 2023년 8월 14일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1860~1920)과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1880~1952)의 넋이 꿈에 그리던 조국에서 해후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최 선생 부부 합장식을 거행했습니다. 최 선생 순국 103년..
2024.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