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552)
-
광암 이벽
이벽(李蘗, 1754년~1785년)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이며 이승훈, 권일신등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입니다. 1754년 경기도 포천의 기호학파 남인 집안에서 부친 이부만(李簿萬:1727~1817)과 청주 한씨 사이에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벽의 집안은 대대로 문인이었으나 조부 때부터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 집안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벽의 형과 동생은 무과에 합격하여 황해병마절도사와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으나 이벽은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벽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다산은 젊은 시절부터 30여 년에 걸쳐 유학경전에 대한 연구서인 『중용강의보』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벽의 도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벽은 다산 형제에게 몇 권을..
2024.02.26 -
음악가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음악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중시하였으며 예(禮)와 악(樂)은 왕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종묘제례에서 선왕의 공덕을 찬미하고, 제례악을 연주하면 조상이 감격하고, 조정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사이가 존경을 하게 되어 이를 방방곡곡에 널리 퍼뜨리면 백성 교화가 실현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음악을 중요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향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바르게 고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용한 신하가 바로 박연이었습니다. 세종은 측근 신하들이 박연에 대해 비난을 많이 하였으나 이런 의견을 물리치고 수십 년간 곁에 두고 음악 사업을 주도하게 했습니다. 1425(세종7)년에는 경기도 남양에서 ‘소리..
2024.02.23 -
여성의병장 윤희순
1907년, 춘천에는 의병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의병 600여 명(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에 항의해 일어난 정미의병) 속에는 아줌마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병사의 식사를 준비해 날라주고 옷가지를 세탁하고 부상자나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았지만 군사 훈련에도 동참했습니다. 일본군이 지나가는 것을 가상해서 찌르기 연습도 하던 이들 중에 47세의 아줌마가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윤희순, 춘천 의병대(의병장은 이소응)를 움직이는 실력자인 유홍석(1841~1913)의 며느리였습니다. 윤희순은 조선 말의 대학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의 맏딸로 경기도 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506년 중종반정..
2024.02.19 -
여몽전쟁 영웅 김윤후
고려시대 최씨 무인정권이 통치하던 13세기 초, 몽골은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앞세워 고려를 1차(1231.8. ~ 1232. 1.)에 이어 1232년 8월부터 2차 침공했습니다. 고려가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하자 이에 분노한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략한 것입니다. 몽골군은 3개월 만인 11월에 남경(한양)을 함락시키고 한강을 건너 광주를 거쳐 남부지방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광주산성(지금의 남한산성)에서 강한 저항으을 받았습니다. 남한산성을 광주 부사 이세화와 광주부민이 지켜낸 것입니다. 함락시키지 못한 몽골군은 용인 방향으로 향했으며 이곳에 처인성이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처인은 수주(水州:오늘날 수원과 화성 일대)의..
2024.02.16 -
신숙주의 선택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입니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으로 그는 집현전 학사 정인지(鄭麟趾), 윤회(尹淮·1380~1436년) 등과 가까웠으므로 신숙주는 자연스레 윤회에게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신숙주가 1439년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처음 맡은 보직이 전농직장(典農直長)이었는데 이조(吏曹)의 담당 관리가 깜빡하고 그에게 오늘날의 공무원증에 해당하는 첩(牒)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관리를 탄핵해 파직시켰는데 신숙주는 스스로 이..
2024.02.13 -
삼전도비를 쓴 이경석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로 1639년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이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어 세운 비석입니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도중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혔다가 일제강점기 때 다시 세워졌으며, 광복 후 주민들에 의해 매립됐다가 1963년 홍수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삼전도비는 송파구 안에서 이전을 거듭하다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현 위치에 세워졌으나, 2007년 2월 삼전도비 철거를 주장하는 백모 씨가 붉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철거 370'이라는 글자를 적는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이경석은 조선 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할아버지는 이수광(李秀光)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
202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