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에 열광한 조선후기 사람들
2023. 6. 3. 09:5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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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하지만 담배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닙니다. 임진왜란 후 17세기에 전래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담배에 대해 여러 가지 이름이 달렸습니다. 초기에는 남쪽에서 온 신령스러운 풀이라는 의미의 ‘남령초’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남쪽에서 전해졌다는 의미로 ‘남초’라고도 했습니다. 연기가 나는 풀이라는 의미의 ‘연초’도 많이 쓰였는데 담배는 전국적으로 재배했으므로, 각 지방의 지명 뒤에 풀 ‘초(草)’자를 붙여 생산지를 표시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담배가 처음에는 기호품으로서가 아닌 대체의약품으로 여겨졌습니다.
1630년쯤 당시 문장가로 알려진 '장유'란 사람이 담배에 대해서 "맛이 쓰고 독성분이 조금 있어 먹지는 못한다. 그러나 입으로 빨아 연기를 뿜어내는데 처음에는 어지러우나 자꾸 피면 '인'이 박혀 어지럽지 않다. 요즘 피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라고 그의 저서 『계곡만필』에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담배를 즐기는 사람들은 피우면 배가 부르고, 배부름을 줄여주며, 추울 때는 몸을 따뜻이, 더울 때는 시원케 한다"며 애연가다운 예찬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담배의 원산지는 아메리카입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가져갔고, 16세기 말 유럽인이 일본에 전했으며, 17세기 초 일본에서 조선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으로 들어온 담배는 숙취 해소, 소화 촉진 등의 효과가 강조됐던 약초로 들어왔습니다. 17세기 초 중국 남쪽 지방으로 전해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담배는 동아시아 모든 지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유행합니다. 담배의 촉발적인 인기에 “담배의 해독을 알고 이를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다”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담배를 ‘요망한 풀’이라는 의미의 요초(妖草)로도 불렀던 이유입니다. 단적인 예로 당시 기록에는 담배가 조선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대중적으로 확산돼 토지마다 쌀 대신 이익이 높은 담배를 심는 폐단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먹거리 작물인 보리, 콩 등의 식량 생산에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급기야 조정에서는 '비옥한 땅에서는 담배를 재배치 말라'고 엄명을 내려 이후 기존 밭이 아닌 화전이나 산악지대에서 담배를 생산했지만 여전히 인기는 날로 더해 17세기 중엽에 한양의 시전거리에서는 쌀, 면포, 어물 다음으로 담배 거래가 활발했다고 합니다.
. “어린아이가 담배 피우는 것은 좋은 행실이 아니다. 연기에 찌들어 골수와 혈기가 마르며, 독한 진액으로 책이 더러워지기도 하고 담뱃불로 의복을 태우기도 한다.” -이덕무-
그와 더불어 이덕무는 어린이가 어른과 맞담배피우는 것에 대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벼슬의 양반들부터 부녀자나 어린아이 그리고 종까지도 모두 담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해동역사』, 한치윤.
‘조선에서는 4~5세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 『하멜표류기』
조선 말 성리학계를 대표하는 간재 전우는 돌아가신 어머니 양은옥의 묘지명을 스승인 임헌회에게 지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임헌회는 양은옥이 양반 여성으로서 훌륭했던 점들을 바탕으로 묘지명을 지었는데 놀랍게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일이 유독 강조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조선사회에 퍼진 담배의 인기는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또 담배를 피우면 침이 많이 고여 입 밖으로 떨어지고 담뱃재가 요리에 날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여성은 금연을 해야 한다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양반 여성에게 흡연은 일상의 소일거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정조와 순조 대에 활동했던 여성 성리학자로 남녀평등을 주장했던 강정일당(정일당 강씨)은 네 살짜리 손녀에게 양반 여성으로서 경계할 행동은 낮잠, 말 많은 것, 과음, 담배를 자주 피우는 것이라고 훈계하며 금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성의 흡연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우려에도 만병통치약이라 불리며 급속도로 퍼진 담배는 남녀노소, 양반·천민 모두 피우는 기호품이 되었습니다. 담배 도입 초창기에는 담배 한 갑의 가격이 은 한 냥이었을 정도로 가격이 굉장히 비쌌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담배를 피우는 것에 조건은 없었지만 평민들이나 천민들이 피울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유교 국가 조선 지배층은 흡연으로 인해 신분 제도가 붕괴할 것을 우려한 것에 대한 조처였는데요. 아버지와 형은 물론 연장자 앞에서 흡연해서는 안 되며 양반 앞에서 평민은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되었습니다. 또 양반의 담뱃대는 길어도 괜찮으나 평민이나 천민의 담뱃대는 짧아야 했습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흡연하는 것은 결례로 여겨졌습니다. 걸으면서 담배를 피우다가 어른이나 연장자를 만나면 담뱃대를 즉시 뒤로 숨겨야 하기도 했습니다. 담배가 유행할 당시 조선의 임금 정조는 담배애연가였으며 조선 최초 담배 애연가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장유를 담배선배로 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금연을 주장하는 신하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습니다.
‘담배는 더위를 씻어주고 기를 평안히 하며 추위를 막아주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변을 볼 때 악취를 쫓아준다. 잠을 청할 때나 시를 짓고 문장을 엮을 때 피워도 좋다.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은 점이 없다. 옛사람으로는 오직 장유만이 이런 담배 맛을 조금 알았다.’
급기야 재위 20년인 1796년 과거시험에서는 ‘어떻게 하면 담배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 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보라는 이른바 ‘남령초책문’을 내립니다. 오늘날로 치면 공무원을 뽑는 국가시험에 담배가 주는 유용성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담배의 양면성에 대해 간파했던 것은 이익으로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담배의 득과 실을 기록하며 결과적으로는 득보다는 실이 많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외에도 영정조 때의 인물 이덕리는 ‘기연다’라는 글에서 담배 해악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담배의 해로움으로 기운이 떨어지고 시력이 저하되며 책이 더러워지고 화재가 날 수 있다는 등의 10가지 이유를 들었고 실학자 박지원, 대동법을 만든 김육, 송시열 또한 금연론자로 송시열은 그의 제자들에게 금연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담배의 인기는 수그러질 줄 몰랐습니다. 20세기 초 조선을 방문한 독일인 에쏜 써드는 "대한제국 남자들이 얼마나 골초인가 하면 그들이 50여년 일생동안 피운 담배연기만으로도 베를린 국립보건소 인원 전체를 질식시킬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개항(1883년) 이후 필터담배가 밀려옵니다. 이때 주로 수입된 담배로는 미국 산 올드골드, 히어로, 스타가 있었고 영국제 스리캣슬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1901년 그리스인 벤들리스가 인천에 동양연초회사를 설립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담배공장을 만듭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수입담배에 밀려 곧 문을 닫고 1903년 미국인 헤밀튼이 맥을 이어 다시 그 자리에 ‘제물포 연초회사’를 세웁니다. 주 제품은 ‘홍도패’ ‘산호’ ‘뽀삐’였으며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실시할 때까지 영업했다고 합니다.
나라는 점점 일본인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는데 담배는 불티나게 팔려 나가자 당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던 서상돈 선생이 대국민참여 호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습니다.
“… 이에 궁리 끝에 전국 2000만 동포가 일제히 담배를 끊는다면 한사람의 한 달 담뱃값을 20전으로 추산하여 3개월이면 국채 액에 도달하리라 봅니다. … 가장 좋은 것은 우리 백성이 석 달만 담배를 끊으면 우리의 국토가 보전될 수 있습니다.”
나라 빚을 갚는 데에 금연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담배는 엄청 인기 있었습니다. 조선의 담배열풍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연초전매국을 만들어 일제가 담배사업을 독점했으며 담배를 팔아 거둔 세금만 해도 전체 세입의 20퍼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전매제는 계속 이어졌으며 홍삼, 소금에도 적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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