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설화에 나오는 처용은 누구인가.

2022. 8. 8. 14:3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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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

서울 달 밝은 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을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향가 「처용가」 
이 글은 향가 ‘처용가’입니다. 처용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순행을 나왔다가 구름과 안개가 끼면서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안개를 걷힐 수 있는 방법을 묻습니다. 그리하여 이곳에 절을 짓자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절을 짓도록 왕이 명령하자 구름이 열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대를 개운포로 불렀습니다. 그 말에 기뻐한 동해 용은 일곱 아들과 함께 나타나 왕의 덕을 기리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헌강왕 5년,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헌강왕은 용왕의 일곱 아들 중 한 명인 처용을 데려와 급찬이라는 벼슬을 주었습니다. 급찬은 진골과 6두품만이 오를 수 있었던 높은 벼슬이었고 이에 아내까지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용은 자주 밤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 사이 처용의 아내를 흠모한 역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하여 처용의 집으로 들어와 처용의 아내를 범했다고 합니다. 이에 처용은 체념하고 용서를 하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역신은 노여워하지 않는 처용의 기세에 탄복하여 처용의 그림을 그려부치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처용무

그런데 처용은 그가 집을 비우고 밤에 돌아다닌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용은 놀러다닌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종교적 행위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귀신 쫓는 행위 말입니다. 그런 처용이 아내를 범한 역신을 물리친 이야기가 바로 처용설화입니다. 예전에 역신이라 하면 흔히 천연두라고 하는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불과 몇 십 년전만 해도 있던 병으로 이 병을 앓았던 사람이 살아남으면 그들의 얼굴에 곰보자국이 남았습니다. 이러한 천연두는 그 뜻이 하늘에서 내려진 자연스러운 병으로 생각되었고 그래서 더더욱 무섭게 여겨졌습니다. 다만 이 천연두가 남북국시대 때 신라에 떠돌았던 역신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왕과 문성왕이 발진성 질환으로 1~2주에 급속하게 사망하였기에 이를 천연두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두 왕이 천연두에 의해 사망했다면 천연두는 남녀노소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갔으니 아마 그 공포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헌강왕의 아버지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합니다. 당시 왕은 그 소리를 싫어했고 그리하여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라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당시 창궐했던 천연두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수유가 얼굴에 창이 났을 때 효능이 좋다는 옛날 고전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를 통해 아마 산수유는 약초로써 밭이 조성되었던 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천연두가 유행하던 시기에 처용은 무속의 힘으로 부인에게 든 천연두를 치료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처용에 대한 신라 사람들의 신뢰감이 높아졌고 백성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에 붙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풍습은 부적과 노래, 춤 등으로 전승되었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력한 힘으로 발휘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다섯 명이 추는 춤으로 발전되었고 큰 잔치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처용은 설화의 주인공에서 역신을 물리치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존재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술사였던 처용이 천연두를 앓고 있던 아내를 치료함으로써 그의 명성이 설화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쿠쉬나메 이야기

이러한 처용에 관해서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그가 서역 즉,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이라는 설입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근거는 바로 처용무를 출 때 쓰는 가면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처용무에 쓰이는 가면은 우리 한국인들과 사뭇 다른 외모를 하고 있습니다. 다소 진한 얼굴에 얼굴과 이목구비가 크고 특히 턱이 두드러져 잇습니다. 전체적인 윤곽이 대체적으로 중동 사람들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이란의 한 교수는 처용설화의 주인공과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의 인물을 연결지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란 나라가 있었는데 이 국가가 아랍의 이슬람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이 때 이 나라의 아브틴 왕자는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페르시아의 왕자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을 알고 중국을 압박하게 됩니다. 이에 페르시아 왕자 일행을 보호하는 데 한계를 느낀 중국은 이 일행을 신라로 보내게 되는데요. 왕자 아브틴은 신라에 망명해 와 신라왕의 공주인 프라랑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나중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귀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낳은 아들 페레이둔 왕자가 훗날 이슬람 자하크왕을 퇴출하고 페르시아를 되찾는다는 것, 이른 바 ‘쿠쉬나메’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대영박물관에서 소장된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싱인데요. 이 이야기를 처용설화와 연결지어 생각한 것은 순전히 보수기라는 교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그는 이에 덧붙입니다. 처용설화의 동해용왕의 아들로 묘사되는데 ‘쿠쉬나메’의 주인공 아브틴의 이름음 ‘물의 아들’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 뜻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쿠쉬나메의 이야기와 신라의 처용설화를 연결짓는 것에는 아직 상당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신라와 당시 아라비아, 페르시아 간에 교류는 유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신라시대에 조성된 고분이나 사찰 등지에서 아라비아, 페르시아산 공에품이나 장식품, 그리고 고분에서는 중앙아시아인들의 특징을 가지는 토용 등이 출토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알려진 아라비아인을 닮은 유물로는 바로 신라 원성왕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석입니다. 원성왕이 재위하고 반세기가 지난 무렵 중국에서 황소의 난리 일어났을 때 아랍과 페르시아에서 온 무슬림 12만 명이 집단학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학살을 피해 무슬림들이 도망쳤는데 중국 내에 남아 있는 회족이 예전에 도망친 무슬림들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한 처용이야기에서 “생김새가 해괴하고 웃차림과 두건이 괴상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동해안에 나타나 왕의 수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라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들이 당시 학살을 피해 신라로 건너온 무슬림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데요. 신라를 기록한 무슬림 학자들의 기록도 존재하니 그들은 저서에서 “금이 풍부한 신라라는 나라가 있으며 그 곳에 정차한 무슬림들은 그 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당시 아라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의학이 발달했던 곳입니다. 아마 처용이 아라비아인이라면 처용은 상당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선진적인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라인아내를 치료하고 신라인들에게 추앙받는 존재로 처용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처용이 신라인이었는지 아라바이인이었는지 주술사였는지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당시의 신라는 전염병으로 인한 고통이 심했던 시기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처용설화가 등장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힘들어진 2022년 지금, 우리에게 처용과 같은 존재가 필요해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방역지침을 지키고 이를 극복해나간다면 우리 모두가 처용이 되고 이 난관을 극복해낸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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