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통일의 향방을 가른 궁예, 견훤, 왕건의 리더쉽

2022. 8. 10. 20:1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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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신라 혜공왕 대에 이르러 나라는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1대 진성여왕 대에는 본격적으로 신라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라가 멸망으로 가게 된 이유에는 구체제인 골품제를 억지로 유지하려는 모습이 컸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신라가 역사 속에서 좀 더 생명력을 갖고 지탱하려면 골품제를 개혁해야만 했습니다. 6두품이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이 6관등인 아찬까지였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6두품을 수용하였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특히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제안한 것은 그야말로 신라를 개혁할 수 있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으나 귀족의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또한 최치원이 활동하던 때 신라의 집권자는 진성여왕이었는데 그는 정사는 뒤로 하고 미소년과 놀러다녔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신라에는 큰 가뭄이 들어 유랑민이 들었습니다. 이에 불난 집에 기름을 부는 짓을 신라왕실이 벌였는데 힘든 신라백성들에게 세금을 독촉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각지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이것이 커지면 나라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므로 신라에 반대하는 국가가 세워지며 그 이름을 그 이전에 신라에 멸망당했던 고구려와 백제의 이름을 딴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바로 고구려와 백제의 부활이었고 따라서 차지했던 영역의 주민들과 호족들이 이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궁예는 본래 신라 왕족출신이었지만 이로부터 버려진 후 앙심을 품었고 그는 양길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며 힘을 키워나갑니다. 당시에는 미륵신앙이 퍼져있었는데 특히 강원도에서 그 힘이강했으며 강원도 지역의 하층민을 궁예를 미륵불의 화신으로 여기며 추종했습니다. 이 때부터 궁예는 미륵을 꿈꿨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궁예는 전장터에서 병사들과 같이 취식하며 가난한 농민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며 사원, 지주, 관청에서 취한 재물들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라 하대의 나타난 도적의 무리의 우두머리 양길을 뛰어넘는 하나의 군주는 넘보는 궁예의 뛰어난 리더쉽이었습니다. 

견훤과 왕건

한편 이 시기에 아자개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신라의 토벌군을 물리쳤고 이 후 그의 아들 견훤이 무진주에 터를 잡고 독자적인 세력을 만드니 이후 900년에 후백제가 되고 1년 뒤에는 궁예가 후고구려가 세워져서 후삼국시대가 열렸습니다. 궁예는 지난 날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여 옛 도읍지 평양에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고 견훤은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씻어내리겠다며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역의 주민들은 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고 각 지방의 세력가들은 궁예 혹은 견훤의 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럼 초기에는 누구의 세력이 셌을까. 강원도의 산골을 기반으로 한 궁예와 삼한 최고의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한 견훤의 대립에서 아무래도 후백제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월등히 옛 백제 지역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궁예에게도 기회는 왔습니다. 임진강을 따라 세력을 넓히며 서해를 장악한 세력 왕륭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는데 그의 아들 왕건도 함께 있던 것입니다. 
왕건이 궁예 밑으로 들어온 것은 후삼국의 저울을 후백제에게서 후고구려쪽으로 기울게 하는 만남이었으니 이후 궁예는 경기북부와 청주, 그리고 소백산 이북의 한강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특히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금성군을 공격하였습니다. 금성군의 호족은 이미 왕건에게 포섭되었으므로 이 지역은 쉽게 궁예의 밑으로 들어왔고 이 고을의 이름은 이후 나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 지역은 뺐고 뺏기는 혈투의 장소가 되었고 912년까지 끌고 온 나주전투의 왕건의 승리로 끝나며 태봉국은 후삼국시기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후백제는 근거지인 나주를 빼앗겼으므로 후삼국통일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무역루트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더욱 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것은 바로 나주를 최종 점령했을 적의 나라 이름입니다. 바로 태봉입니다. 후고구려에서 마진으로 바뀐 것인데 이것은 904년의 일이었고 도읍지도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지역의 주민 1000여 가구를 이곳에 옮겨 살게 했습니다. 왜 주민까지 옮겨 살게 했을까. 궁예 그 자신이 지지기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신라 왕자 출신이라고 하지만 그 덕에 후고구려를 세운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궁예 자신은 그의 출신성분과는 다르게 요즘 말로 치면 흙수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다른 세력과 민중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국호변경과 수도 천도를 단행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국호였던 후고구려 즉, 고려는 고구려의 역사를 계승하겠다는 궁예의 의지로 이를 통하여 강원도와 송악, 강화, 경기 지역의 세력을 지지를 얻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국호인 마진은 범어 ‘마하진단’의 약칭으로 대동방국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공주의 호족 홍기도 궁예 밑으로 들어옵니다. 이지역은 옛 백제와 친한 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이라고 고칩니다.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화합하는 세상이란 뜻이 포함되며 통일의 의지가 반영된 나라이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의탁한 모든 세력이 지지했을까요. 처음에 마진이라 했을 때 그와 손잡았던 고구려 지역과 관련된 세력가들이 크게 반발했습니다. 궁예는 이상국가를 꿈꾸었지만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면을 간관한 버린 셈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후대 역사가들에게 폭정을 일삼은 군주로 평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궁예는 또 실수를 정치적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삼한의 절반을 넘게 차지했을 만큼 영토가 커졌으면 이를 자신의 측근세력에게 나누어 통치할 수 있는 배려가 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통일이 완성되지도 않았음에도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도록 했고 호족들은 궁예를 대신할 인물로 왕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궁예가 흙수저였다면 왕건은 그야말로 금수저입니다. 왕건은 나주전투에서 승리를 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왕건을 주축으로 배 100여 척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즉, 왕건은 배 100여 척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상당한 경제력을 지닌 해상세력이었고 이러한 해상세력에서의 경험과 재력의 왕건의 공으로 궁예가 나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세력을 처단하며 미륵불로 자처한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과 혼인을 맺으며 인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도운 박술희, 복지겸도 충남 당진출신의 해상세력이었으므로 왕건은 당시의 지배층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왕건이 민심을 몰라라한 것도 아닙니다. 고려의 왕이 된 지 10년 째 된 927년 왕건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의 일입니다.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의 수도를 경주를 점령하고 경애왕을 죽인 후 경순왕을 왕위에 올립니다. 그러면서 왕비를 겁탈하는 등 잔학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 때 신라를 구원하러 온 고려군이 팔공산에서 군사 5000여 명을 잃고 신숭겸과 김락을 전사를 하게 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경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 신라의 왕을 죽이고 벌인 잔혹한 견훤의 행동으로 인해 이 지역의 세력이 자발적으로 견훤의 밑으로 들어오게 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고창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해당 지역의 여러 성주와 세력가들이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의 힘의 세기와 전략이 전투의 승리를 가져온다고 생각했으나 왕건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세력이 약해진 신라를 존중하면서 억지로 점령하지 않았고 이러한 그의 행보는 많은 세력가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한 번 전투의 승리는 견훤이 가져갈 수 있을지 몰라도 왕건은 길게 보고 통일의 조건으로 민심규합을 본 것입니다. 기존 지배계층를 배려하지 않고 중앙집권화에 힘을 쏟은 궁예와 신라를 인정하지 않고 무력으로 천하를 가져려고 했던 견훤, 그리고 재력을 바탕으로 기존 기득권과의 연합을 꾀한 왕건 중에 고려가 승자가 된 것은 이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갖는 리더쉽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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