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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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는 달랐던 병자호란
1627년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은 후금의 형제의 관계를 맺기로 하고 평화를 약속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대륙의 지배를 두고 명과 다투던 후금의 세력이 점차 우위에 올라서자 후금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후금은 조선에게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고 병선 혹은 병력을 요구하더니 더 나아가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후금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한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635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향하여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전쟁을 주장한 신하들 중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후금 아니 청의 침입을 맞..
2023.02.27 -
정묘호란은 어땠나.
광해군에서 인조로 바뀐 인조반정,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광해군의 잘못으로 삼고 일으킨 반정이기에 인조정권은 이전의 외교정책에 비교하여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명배금정책, 이 정책이 후금을 자극했을까. 1627년 후금이 조선으로 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는 말이 들렸을 때 조선 조정은 후금의 군대가 왜 조선으로 쳐들어왔는지 갸우뚱했다고 합니다.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은 맞지만 조선입장에서는 후금을 자극할만한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후금의 통치자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였습니다. 그는 후에 청 태종이 되는 인물로 대외정책에 있어 강경론자였다고 하며 그에 따라 조선정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조선에 대한 정벌을 벼르고 있던..
2023.02.26 -
이괄의 난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위기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괄의 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괄은 인조가 반정을 일으킬 때 반정군의 임시대장을 맡았습니다. 본래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였으나 당시 이들의 반정계획은 알려진 상황이었고 김류가 이에 대해 고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반정을 일으키기로 한 장소에 약속보다 늦게 나타납니다. 반정군의 대장으로 이괄이 될 뻔했으나 다시 김류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인조반정, 이 거사에서 이괄은 나름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군대를 일거에 정비하고 반정을 이끌었으니 반정 직후에는 ‘이괄이 병조판서감이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일등공신이 아닌 이등 공신에 책봉되었습니다. 이에 분노를 할..
2023.02.25 -
인조반정 광해군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광해군은 왕이 되었으나 왕으로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조반정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에게 여러 죄목이 지목되어 물러나게 되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인목대비 폐비 문제였습니다. 그는 왜 그래야 했을까. 현대에 들어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성군을 쫓아냈다라는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에 나라를 위해 뛰어다니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역사서에 기록된 그의 이미지와 반정으로 쫓겨난 것과는 상반되는 측면이 비쳐지기는 하지만 그러한 평가가 인조반정을 성군을 쫓아낸 반란으로까지 평가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특정정치집단을 선호한 것은 단지 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물론 전제군주가 여러 정치집단을 이해..
2023.02.24 -
광해군은 왜 대동법 시행을 꺼렸나.
때는 1600년대 초반 임진왜란은 끝이 났지만 여전히 그 상처는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경작지는 크게 훼손되었고 이로 인해 농사지을 땅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농지도 부자 양반들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반 농민들은 양반들의 토지를 빌려 경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은 경작을 하고 나서 지주에게 많은 지대를 받쳐야 했습니다. 여기에 세금도 내야 했으니 농민들의 삶은 나아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임금인 광해군에게 시급한 것은 이러한 농민들을 살리는 일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경작지를 늘려야 했습니다. 당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조선 전체를 합친다 해도 전쟁 전 수준의 전라도 수준 정도인 50여만결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공명첩을 시행하여 돈을 받아 세금을..
2023.02.23 -
사르후 전투 그리고 광해군의 외교정책
광해군은 조선의 제 15대 왕이지만 그의 단어에는 왕이란 말대신 군이 붙습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였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형도 있었을 것이고 그는 임해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막장이었으니 그러한 이유로 세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례로 그는 임진왜란 중에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아야 했는데 본연의 임무는 제쳐두고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녔습니다. 이에 참다못한 국경인, 국세필 등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하여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넘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나름 공이 있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선조는 세자의 자리에 그의 아들 중 유..
2023.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