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왕이었던 문종

2023. 2. 6. 18: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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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5대 임금은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었습니다. 그는 적장자 왕위 계승원칙으로 왕이 된 첫 번째 조선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으로서 재위한 기간은 채 3년도 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서 알 수 있는 문종에 대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이전의 왕 세종이나 이후의 단종, 세조에 비해 적지만 그럼에도 문종은 역사에서 말하는 존재감만큼 묻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세자 수업만 28년 8개월을 지냈습니다. 그야말로 준비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모는 근사한 수염에 기품 있는 얼굴로 명나라 사신에게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성품 또한 너그럽고 인내심이 많았으며 효심과 우애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런 반면에 여색을 밝히거나 노래를 좋아하지 않아서 개인적인 사건을 일으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 음악, 말타기, 활쏘기, 서예, 수학 등에 능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만능인 세자였습니다. 
이런 문종에게도 세자빈과 관련해서는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세자빈은 휘빈 김씨였습니다, 당시 문종의 나이 14세였고 김씨의 나이는 16세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김씨의 외모가 탐탁치 않았는지 문종은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김씨는 세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민간용법인 압승술이었습니다. 이것은 문종의 총애를 받는다고 생각되는 궁녀들의 신발을 불태워 그 가루를 술에 타 세자에게 마시게 하거나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자기 몸에 지니고 다니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당시 세종의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자기 측근 상궁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따라서 김씨는 1429년, 2년 만에 폐비되었습니다. 
문종의 두 번째 부인은 손빈 봉씨였습니다. 문종의 나이 16세였습니다. 당시 세자비를 간택할 때에 외모도 고려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대의 의견을 낸 신하들도 있었지만 덕이 있는지 없는지 잠깐 사이에 알 수 없으나 외모보고 뽑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느냐며 반문합니다.  그렇게 간택된 순빈 봉씨는 색욕이 강하고 술에 취하는 것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순빈 봉씨가 회임을 하지 못해 속앓이를 했는데 권승휘가 먼저 회임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짜 임신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문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순빈 봉씨는 동성애 스캔들을 일으킵니다. 궁녀 소쌍에게 마음을 주고는 여러 차례 잠자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잠시라도 소쌍이 자신의 곁에 있지 않으면 질투를 했다고 하는데 소쌍은 다른 이에게 빈께서 자신을 너무 사랑하시어 너무 무섭다고 토로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세종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이에 세종은 소쌍을 추궁하니 스캔들의 전말이 들어난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고려말에 유행한 원나라의 풍습 때문에 성문화가 자유분방했다고 합니다. 고려말의 궁중 시녀들이나 환관들이 고스란히 조선의 것으로 대체된 것인데 하여간 조선왕실에서 세자빈의 동성애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곤장을 50대 이상 쳤다고 하며 이로 인해 궁궐 내에서 동성애가 사라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순빈 봉씨는 1436년에 폐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세 번째 부인은 현덕왕후 권씨로 권전의 딸이자 문종의 후궁으로 승휘로 봉해진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문종과의 관계에서 딸을 얻었지만 어려서 잃었고 1441년에 현덕왕후는 다시금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단종입니다. 하지만 출산후유증으로 현덕왕후는 승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호는 현덕빈이었으나 문종이 즉위하고 난 뒤에 현덕왕후에 봉해졌고 이후 문종은 1452년 숨을 거둘 때까지 왕비를 두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문종은 왕비 운이 없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내조를 받아 왕위에 오르고 권력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는데 문종은 그 덕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효과를 본 것입니다. 

이후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문종, 하지만 그가 왕위에 머무른 것은 고작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단종이 있게 되는데 세조가 조카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비극이 일어나면서 병으로 인해 일찍 사망한 문종이 이 사태의 일정부분 책임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때문에 병약한 모습이 바로 문종이 이미지로 그려질 것이고 그에 더 나아가 무능이라는 단어가 스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종의 집권말기에 문종은 사실상 정치적 파트너였습니다. 1442년 세종이 돌연 세자에게 섭정을 하게 한 것입니다. 물론 당시 대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종을 정치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세종은 경복궁에 자선당이라는 건물을 만듭니다. 이것은 세자 동궁이었고 이와 더불어 세자 직속 비서실로 첨사원이라는 기관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첨사원은 왕의 승정원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측우기 발명과 역사서 편찬에서 문종이 상당부분 관여한 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의 업적에는 문종도 상당부분 관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4군 6진 설치도 문종이 한 일이고 화차같은 신병기도 설계하기도 하였습니다. 병약한 이미지로 각인될 문종이기에 군사분야에서 업적을 쌓은 것은 상당히 의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종은 진법 운용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이기도 했고 화차를 만들어 그 활용방법에 대해서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활솜씨도 뛰어나니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무인적인 면모도 갖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종의 말년 8년을 문종이 정치적으로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에는 그의 지나친 효심이 발단이 된 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바로 삼년상 때문입니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책임을 자식 탓이라고 자식 스스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문종도 이에 대해 상당부분 마음의 짐을 졌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종은 아버지 세종이 돌아가셨을 때는 식음을 전폐했을 정도였는데 아버지 죽음 이전에 그의 어머니 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이 과정에서 몸이 안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세종이 연이어 세상을 뜨면서 상을 연이어 치르게 되고 밤낮으로 곡을 하면서 문종의 몸은 더욱 안좋아졌습니다. 어찌 보면 왕으로서 국사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몸을 편안히 몸을 해야 했는데 문종은 스스로 그의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효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라 여기며 문종은 상을 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종은 어느 날 집현전에서 토론하고 난 뒤에 신숙주, 박팽년을 불러 직접 손을 잡고 등을 두드리면서 어린 아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정말 앞으로의 닥칠 비극을 문종은 정말 몰랐을까. 

사실 문종대에는 수양대군와 안평대군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종의 죽음에 현대에서는 물음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가 독살당했다는 것입니다. 기록에서는 문종이 39살에 종기로 죽었다고 하나 문종이 종기로 누워있을 때 전순의가 뀡고기를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꿩이나 닭, 오리 등은 껍질에 기름이 많아 종기환자에게 절대 처방해서는 안되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꿩고기는 겨울철 대지가 얼었을 때 올려야 하지만 전순의는 이를 무시했고 문종에게 지속적으로 섭취시킨 것은 고의성이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문종이 독살을 당했다면 그의 아들 단종의 운명도 이미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한다면 어린 조카 단종이 국정을 운영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양대군이 불가피하게 왕위를 찬탈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도 잃게 됩니다. 만약 문종이 계속 왕위를 이어갔더라면 조선의 태평성대는 좀 더 이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그의 정치적 능력은 무시된 채 다소 병약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남게 된 건 그의 권력욕 많은 어느 개인에 의한 역사조작일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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