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공신정치

2023. 2. 8. 18:2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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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왕위 찬탈이 과연 정당했는지 아니면 부도덕했는지 그것은 후대 사람들의 판단의 몫일 것입니다. 세조가 이후 어떠한 정치적 행보를 걸어왔든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여전히 현대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에서도 그런데 당시 세조는 마음이 어땠을까. 자신도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 역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태종이 왕자의 난을 통해 왕의 자리에 올라 왕권강화에 힘을 쏟듯이 세조 역시 왕이 되고 나서 한 일은 바로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세력들, 즉 자신이 왕에 될 적에 도움을 준 공신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이끌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조의 시대는 소수의 공신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조는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공신을 이따금씩 선정하기도 했는데 1453년 계유정난에는 정난공신 43명을 책봉하고 1455년 즉위직후에는 좌익공신 46명을 선정했으며 1467년 이시애 난을 평정한 뒤에는 적개공신 45명을 녹훈했습니다. 그리고 세조 붕어 직후 남이의 역모를 진압했다는 명분으로 책봉된 익대공신이 39명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신 책봉 횟수는 건국부터 세조이전까지의 횟수랑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세조는 그들로부터 충성의 서약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1455년 어느 날 어둠 속에서 세조와 신하들이 모였습니다. 그렇게 모인 장소는 바로 회맹단, 이 곳은 임금이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들을 모아 충성서약을 받는 곳으로 세조도 이 곳에서 신하들의 충성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행해진 의식이 바로 삽혈의식이었습니다. 이는 칼로 살아있는 짐승의 피를 내어 입가에 바르는 것으로 세조가 하고 나면 뒤에 있는 신하들도 따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왕과 공신들이 모여서 천지신명 앞에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으로 본래 짐승의 피를 마시는 것이었으나 후대에 입가에 바르는 것으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일등 공신에게는 전토 1백 50결, 노비 13명, 백금 50냥 등과 시종 7인, 병졸 10명을 하사하고 직계아들은 관리로 채용하며 자손은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용서하심이 길이 세대에 미침이 있도록 하소서,” 『세조실록』
그리고 공신이 왕에게 충성하는 대가로 위와 같은 혜택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수양대군이 세조가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태종이 종친과 공신들을 거의 숙청하여 없앴기 때문에 세종은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며 국정을 이끌어나갔습니다. 문제는 세종이 죽고 나서 이들의 힘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단종이 오르고 종친이나 외척이 없는 마당에 신하들의 권한이 세지다보니 수양대군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공신들과 힘을 합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조가 즉위하고 나서부터 함길도에서는 이징옥의 난이, 그리고 단종복위운동과 금성대군의 역모사건, 그리고 이시애의 난까지 일어나면서 세조는 자신이 믿을 것은 공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구사하고자 했고 이를 도와줄 사람들이 바로 공신들이었습니다. 공신들 역시 신하의 입장이었지만 강력한 왕권 아래 신하가 있어야 된다는 세조의 생각에 동조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세조시대의 강력한 왕권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조의 왕위 등극에 많은 사람들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는데 그 중에 1,2등을 다투는 사람은 바로 한명회와 신숙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유정난을 설계한 한명회는 개경의 경덕궁지기에서 일약 일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숙주는 세종의 총애를 받던 학자로 당시 이뿐만이 아니라 여러 집현전의 학자들이 계유정난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대신들을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집현전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덩달아 왕권도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수양대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신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했는데 집현전의 학자들도 거기에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현전 학자들이 수양대군의 왕위 계승에 반발한 것은 계유정난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동조한 세력은 갖가지 혜택을 얻었는데 이 중 홍윤성이라는 사람은 윤덕녕이라는 여인네 집과 토지와 관련하여 분쟁을 벌이다 홍윤성네 종 김석을산이 윤덕녕의 남편의 죽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홍윤성이 공신이라는 이유로 면책을 받습니다. 한편 세조는 이러한 공신들을 위해 자주 술자리를 벌이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측근들의 진심을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신숙주가 술에 취해 세조와 팔씨름을 벌이기도 했는데 첫 판은 지니 다시 한 번 도전하여 이기는 일이 벌어집니다. 한명회가 이것은 큰일났다 싶어 신숙주네 집에 촛대를 다 치우도록 했다고 합니다. 평소 신숙주가 집에 들어가면 술에 취했더라도 책을 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팔씨름이 있던 날, 술이 센 세조는 신숙주의 집에 가보았는데 불을 꺼진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술 취해서 그랬구나하고 그냥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조는 이렇게 술을 먹여 진심을 알아보기도 했는데 정인지는 세조에게 ‘네가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을 하였고 세조가 아꼈던 무사 양정이 세조에게 이제 그만 권좌에서 내려오라는 말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화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한명회와 신숙주가 세조의 명에 의해 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납니다. 세조가 왕이 된 지 13년이 되는 해에 북쪽 변방에서 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이시애의 난이었습니다. 회령부사 이시애는 절도사 강효문과 그 일행들을 참살하고 함길도일대를 장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난은 3개월의 시간이 걸려 진압되었습니다. 여기서 난이 일어난 것은 세조의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이 곳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자 김종서의 6진 개척 때에는 토호들의 도움이 컸던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이 곳에서 토호들의 영향력은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여진과 가까운 변방지역이었기 때문에 토호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치권과 함께 이 곳에 백성들이 옮겨와 살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조는 왕권강화를 면목으로 이곳 출신의 수령 대신 한양 출신의 인물로 대체하였으며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과 유향소와 갈등을 빚기 일쑤였습니다. 유향소는 일종의 지방자치기구였고 이들의 임무는 지방의 풍속을 잡는 동시에 지방관리를 감시하는 일도 가졌기 때문에 유향소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간에 마찰은 피할 수 없었으나 함길도 지방은 특히나 더 했던 것입니다. 이에 이시애는 ‘남도의 군대가 올라와 함길도 사람들을 다 죽인다.’고하여 도민들의 힘을 끌어 모았으며 세조에게 ‘절도사 강효문이 한양의 한명회, 신숙주와 결탁하여 함길도의 군사를 끌고 한양으로 올라가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던 인물 한명회와 신숙주가 하옥되고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면서 공신이 책봉되었는데 여기서 당연히 한명회와 신숙주가 제외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한명회입장에서는 이것이 바로 토사구팽이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되었든 세조만의 공신에 의한 정치는 폐쇄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깜짝 발탁으로 세조의 닫힌 정치에도 일말의 틈새는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마저 실패였을까. 그는 경국대전을 편찬을 시작했으며 여진족을 토벌하였습니다. 그리고 호패제도를 강화하여 군사력을 확보, 안정적인 세금징수를 도모했으며 퇴직관리에게도 지급하던 토지를 현직관리에만 주도록 한 직전법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튼튼히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은 군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태종처럼 형제들간 왕위 계승 싸움에서 벌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조카인 왕을 몰아낸 점, 그리고 철저하게 공신들 위주로 정치를 행할 수 없었던 점은 세조의 업적을 곧이 곧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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