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

2023. 2. 9. 18:2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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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은 조선 세조시기에 활약한 장수입니다. 특히 그는 무과에 17살에 일찍이 합격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조선 전기 문과 급제평균연령이 30세 전후였고 무과도 거의 비슷했다고 하니 남이의 능력은 발군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이면서 당시 최고 권세가인 권람의 사위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권람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남이장군은 귀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얼굴에 분칠을 한 소년귀신을 보게 되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뒤를 쫓으니 좌의정 권람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후 권람의 딸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리고 귀신이 붙어있는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이는 귀신을 쫓아내니 권람의 딸은 되살아났다고 합니다. 이에 권람은 딸을 남이장군과 결혼시키려고 했으나 사주를 본 역술가는 남이가 나라를 위해 헌신하지만 단명할 상이라고 말하며 반면 딸은 복만 누리다 살다 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역술가의 예언은 맞았을까. 
남이 장군은 17세에 무과에 급제합니다. 이 무과는 조선 태종 2년에 처음 실시된 과거제도로 세조 때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던 만큼 자신에게 충성할 무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해서 이 시기에 무과급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무과 중 정식무과에서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창(騎槍), 기사(騎射), 격구(擊毬)의 종목을 시험하였습니다. 목전은 나무로 만든 화살로 240보 이상 날려야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종목이고 편전은 짧은 화살을 통아 또는 덧살이라고 부르는 총열에 넣어서 쓰는 화살로 130보 거리에 있는 표적을 맞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5개의 표적을 50보 간격으로 놓고 말을 타고 달려 나가면서 차례로 과녁을 맞히는 기사, 일종의 기마술인 격구까지, 그리고 여기에 편전을 더했으니 이는 반으로 쪼갠 대나무 통에 넣어서 쏘는 매우 짧은 특수한 화살을 사용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무기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과에서도 필기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복시에서 이를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무인들은 무예는 물론, 어느 정도 기본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를 평정하고 그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봉됩니다. 이 사건은 남이장군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곳은 함길도로 세조 때 이 지역에 일어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정예 병력을 투입합니다. 그 중에 남이장군도 있었고 이난이 끝나고 난 뒤에 그의 서열은 급격하게 오르게 되었습니다. 
‘북청의 싸움에서 남이가 진 앞에 출몰하여 사력을 다하여 싸우니 향하는 곳마다 적이 마구 쓰러졌고 몸에 4,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안색이 태연자약했다.’ 『세조실록』

또한 남이장군은 건주여진 정벌에서 활약하였습니다. 다시 이만주라는 여진이 조선 북방을 괴롭혔기 때문에 기로 인해 세종 시기에 최윤덕으로 하여금 이 지역을 쳐서 4군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때 이만주는 도망쳐서 살아남았는데 다시 이만주가 조선과 요동지방을 침범하여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조선은 4군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세조의 명을 받든 남이는 압록강을 건너 이만주의 본진을 쳤고 만주(李滿住)와 이고납합(李古納哈) 부자 등 24명을 참살(慘殺)하고, 이만주와 이고납합의 처자(妻子)와 부녀자 24명을 사로잡고, 활로 사살(射殺)한 자가 1백 75명이고, 중국인 포로 6명과 병기⋅우마 등을 거두고 가사(家舍)와 곡식을 쌓아둔 곳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립니다. 당시 이만주는 누르하치가 출현하기 전까지 국가에 준하는 세력을 구축했던 인물인데 남이, 강순의 정벌은 요, 금같은 북방유목민족왕조의 출현을 막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벌의 여파로 향후 100여 년동안 여진족에서 강력한 추장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병조판서의 자리에 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병조판서 임명되고 나서 얼마 있다가 혜성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습니다. 
‘오늘(10월 24일) 저녁에 남이가 저에게 찾아와 "오늘 혜성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너는 보았느냐"라고 하길래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남이가 "이제 은하수 한가운데에 밝은 빛의 혜성이 있어서 주위의 별이 안보인다."라고 했고 제가《강목(綱目)》이란 책을 펼쳐 혜성이 나타난 때를 찾아보니 그 책에 달린 주석에 "혜성이 희면 장군이 반역을 하고, 2년안에 큰 반란이 있다."라고 적혀있어 이를 남이에게 말하니 남이가 탄식하며 "그 일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당시 이러한 별의 움직임을 불길한 징조라 여겼습니다. 예를 들면 성종실록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때에 혜성이 나타나자, 한명회가 아뢰기를, ’성문이 이 변을 보이었으니, 그 응험이 두렵습니다. 창덕궁에 성이 없으니 마땅히 중신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숙위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옛날 사람들은 일어한 별의 움직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남이장군의 말은 좀 달랐습니다. 그는 단지 새로운 것이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는데 유자광은 이를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조가 곧 사망하고 다음 왕 예종 대 즉 한달 뒤에 남이가 역모죄로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혜성이 오래 머무르면 큰 변란이 있다고 심문하자 남이는 죽음을 예감하면 그것이 역모라면 세조대왕의 유명을 받들어 간신배들을 모두 죽이지 못했으니 그것이 대역죄인이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렇게 병조판서의 자리까지 오른 남이장군은 그렇게 잡혀온 지 3일만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이 장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간신 중의 하나인 유자광이었습니다. 그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했으며 서얼 출신이라고 합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예종 대에 남이를 고발하고 연산군 때에는 무오사화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의 제자들이 화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러더니 1504년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의 생모인 윤시의 폐비에 찬성했던 이극균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1등공신에 책봉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탄핵이 이어지면서 평해로 유배되어 1512년에 사망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쯤 되면 역술가가 한 남이에 대한 예언은 맞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나라에 충성했던 그의 비극적인 스토리와 권람의 딸과 사랑이야기, 그리고 그가 귀신을 볼 수 있고 그것을 쫓아버렸다는 에피소드까지 더해져 최영장군과 함께 신령으로 모시는 무속인들이 많은 이유도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남이섬, 이 곳은 남이장군의 이름이 달려있습니다. 이 곳은 한류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이 남이섬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섬 한 쪽에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다는 곳은 이곳만이 아닙니다. 경기도 화성에도 남이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사라지고 白頭山石 磨刀盡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
남자 이십세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니 男兒二十 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는가 後世誰稱大丈夫
남이장군이 남긴 북정가라는 시입니다. 나중에 유자광이 역모로 고변할 때에 세 번째 행의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면서 남이장군이 이러한 시를 읊으면서 야심을 키웠다고 주장하니 남이장군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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