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왜 폭군이 되었나.

2023. 2. 11. 18:2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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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의 자리에 오른 윤씨였습니다. 연산군은 7세 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세자 수업을 받으며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10대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결함이 있었으니 그의 친모가 폐비 윤씨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종의 첫 후궁이었고 그리하여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 힘들었으나 검소함과 겸손함 등으로 왕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비가 된 후에 폐비 윤씨가 이전의 성품과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는데 예를 들면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였고 특히 그 정도가 지나쳐 임금의 얼굴에 상처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죄로 말미암아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관여하여 왕비를 폐할 것을 논하게 됩니다. 대신들은 왕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 폐비윤씨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폐비 윤씨는 쫓겨난 이후에 특별히 문제가 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인수대비의 밀명을 받은 안중경이 폐비 윤씨가 반성을 하지 않고 성종을 원망한다는 거짓보고를 하여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종은 죽기 전에 향후 100년간 폐비 윤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한편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인 만큼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으나 적장자와 성종의 지원으로 왕위의 오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친모가 일찍 이별했던 연산군의 안타까운 사연이 실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종의 허락을 받고 거리로 나가 놀다오는 세자, 돌아오자 성종은 거리에 나가 놀 때 어떤 일을 겪었느냐는 성종의 물음에 세자 연산군은 특별히 구경할만한 것은 없었으나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리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웠다는 말을 하여 성종은 이를 슬피 여겼다고 합니다. 
연산군은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정 초기에는 그런대로 운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농업진흥정책으로 장시가 크게 확대되고 수리시설 및 시비법 개선 등으로 구매력이 증대, 이는 전국적인 유통망의 확장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과의 사무역은 증가하고 국내 은광업도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성종이 등용한 사림에 의한 정치가 그럭저럭 평화롭게 유지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즉위 당시 몰랐던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어느 순간 연산군이 인지하게 됩니다. 

폐비 윤씨

국왕이 돌아가시면 5개월째에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이 때에 묘비문을 묻는데 이 때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아들로 나온 것입니다. 당시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를 정현왕후로 알았는데 승지들에게 잘못된 것 아니냐며 묻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내막을 알고는 그 충격을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후에 연산군과 사림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삼사라고 불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대신들의 권력이 셌습니다. 이러한 삼사의 권한은 세조 때 육성한 것인데 당시 세조 때 공신들이 많이 나왔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삼사의 간원들, 즉 언관들을 적극 육성합니다. 그렇게 육성된 삼사는 그들의 권한을 통해 왕이 하는 것에 반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성종 때에는 그럭저럭 이들과 조화를 이루며 잘 지냈지만 문제는 연산군 때 갈등의 골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언론 삼사는 면책특권이 있어서 어떤 말을 해도 걸리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때부터 연산군은 어디 한 번 걸리기만 해봐라는 식으로 기다려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지게 됩니다. 
당시 실록청 당상이던 이극돈, 그리고 실록에 들어갈 사초들을 정리하는데 당시 이극돈은 김일손과 거래를 하려 합니다. 사초에 이극돈이 정희왕후 상중에 기생을 끼고 놀았다거나 뇌물을 받은 일이 적혀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없애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일손은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여기에 이극돈은 복수를 위해 사초를 뒤지기 시작합니다. 그 때 같이 사초를 뒤지던 유자광이란 사람이 세조에 대한 불온한 기록을 찾아내게 됩니다.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가 세자가 되었을 때 후궁 세 명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의경세자가 죽고 나서 세조가 과부가 된 며느리를 불렀는데 이를 패륜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육신에 대한 좋은 평가와 함께 계유정난에 대한 혹평이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초의 작성자가 바로 김일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유한 글을 적어 넣었는데 김종직이 잠을 잤다가 꿈을 꾸었는데 신선이 나타나 자신을 초나라 회왕 의제라고 하며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번강에 버러졌다고 말한 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회왕을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조에 대한 반감으로 여겨졌고 김일손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오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이 참수되었습니다. 

이후 문제는 계속되었습니다. 연산군 대에 특별기녀들인 흥청을 선발했는데 문제는 이들을 관리하는데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인원도 많아서 흥청 300명과 운평 1000명을 선발하였는데 이러한 기녀들은 아름답고 음악성이 있으며 활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강압에 못이겨 사람을 잘못 뽑아 곤혹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비와 기생은 물론, 개인몸종, 심지어 양가집 부녀자까지 선발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렇듯 여성편력이 심했던 연산군의 행보에 무오사화 때 지원하던 대신들도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본의 아니게 거의 대부분의 대신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미인들을 뽑는데 힘을 쏟은 것이 바로 간신 임사홍이었습니다. 
‘내관 박승은이 임금 앞에서 웃음을 머금었으니 장 1백을 치라’ 『연산군 일기』
‘벌주를 마실 때에 침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 짐작에 최응현인 듯하니 국문하라.’
그리고 다시 한 번 폭풍이 몰아치게 되는 일이 생기니 당시 예조판서였던 이세좌라는 대신이 궁중연회에서 연산군 공룡포에 술을 엎지른 것이었습니다. 술을 받다가 실수한 것인데 연산군은 이를 트집잡아 이세좌를 국문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갑자사화로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은 대간들이 따져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연산군이 몰아부쳤고 그에 따라 대신과 삼사 관료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아버지의 후궁, 유모 등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의 복수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대량 참살극에 기름을 부은 것은 ‘폐비 윤씨가 억울하게 중상모략을 당해 돌아가셨다.’고 말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임사홍은 열어선 안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연산군에게 보여준 꼴이었고 이에 연산군이 분노에 치민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갑자사화 때에는 239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단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연산군에 복수심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기일에도 유흥을 즐겼으니 말입니다. 
이후 조정 내 견제세력이 없어진 연산군은 더욱 유흥을 즐기며 여자를 탐했으며 여기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면서 국가의 재정은 악화되고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대부의 여인도 탐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성종의 친형이자 연산군의 백부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게 되었고 이 일로 박씨는 수치심에 자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중종반정의 도화선이 되었고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친동생 박원종의 주도로 이루어진 거사에 연산군은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고 진성대군은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중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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