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과 기축옥사

2023. 2. 13. 18:3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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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정철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관동별곡 등 조선을 대표하는 가사를 짓어 현재에도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문학작품을 남겼습니다. 정철은 153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철의 집안은 왕실과 관련있으며 큰 누나가 12대 임금인 인종의 숙의였고 작은 누나는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명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같이 놀기도 한 사이였습니다. 나름 집안이 빵빵했지만 그의 가문에도 고난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요절하고 계림군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능지처참당하면서 집안이 기운 것입니다. 당시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사온령 즉, 궁중에서 사용하는 술을 빚는 사온서의 책임자였으며 맏형인 정자는 이조전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철은 10세 되던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아버지는 함경도 함평으로, 맏형은 정자는 광양으로 귀양가게 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11세 되던 해인 1547년에는 벽서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일은 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으로 아버지는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를 갔고 맏형은 장형을 받은 뒤에 경원으로 유배를 가다가 장독이 도져 32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정철은 유배지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명종 6년에 순회세자가 태어나면서 대사면령이 내려졌는데 이 때 정유침은 가족들과 함께 선산이 있는 담양 창평 당지산으로 가서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정철은 10년 동안 호남사림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선비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담양에서 생활하던 중 17세가 되면서 문화 유씨 유강항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1561년 그는 26세에 진사시에 1등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그리고 1566년에는 31세에 정랑, 직강, 헌납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명종의 부탁을 거절하여 지방의 현감이나 도사 등 외직으로 밀려났습니다. 당시 명종의 가까운 친척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서얼 처남을 죽였는데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 선처를 부탁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이 일로 경양군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한편 정철에게는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 정무를 보다가도 술로 인해 태도가 흐트러지기도 했으며 이 때 대간들이 예조판서가 술을 너무 좋아해서 되겠느냐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철의 정적들로 그의 술 습관을 꼬집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철 스스로도 이러한 것으로 인해 스스로 괴로워한 것으로 보입니다. 술을 너무 먹어 생각이 안나는 적이 있던 것입니다. 한 번은 선조가 정철에게 술 은잔 하나를 선물했는데 하루에 한잔씩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철은 은잔을 두드려퍼서 크게 늘렸다고 합니다. 

정철은 관직에 들어설 때 조선의 조정은 분당이 심했습니다. 당시 동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권력의 중심에 있던 때로 신임이조전랑 추천문제로 부딪혔을 때 동인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즈음 이러한 붕당의 폐해가 심각하였는데 당시 정철은 동인들을 꺾고자 애를 썼으나 당시 서인의 편에 섰던 이이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몸과 마음이 지친 정철은 담양 창평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43세 때인 1578년 다시 벼슬을 얻었습니다.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 동인인 허엽(許曄)이 서인 윤두수(尹斗壽)를 탄핵하면서 진도군수 이수로부터 쌀을 뇌물로 받았다)과 관련한 일이 있었는데 동인은 윤두수를 처벌하자 하였고 서인은 이를 간언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정철은 반대파인 동인에 맞서다가 탄핵을 맞았습니다. 이후 1580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등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48세 때에 예조 판서로 승진하였고 1584년 율곡이 죽은 이후에는 대사헌이 되었고 서인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585년에는 다시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때 지어진 가사가 바로 사미인곡, 속미인곡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선조에 대한 그리움과 충성심을 담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정철이 다시 정치계에 뛰어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중대한 일이므로 3정승 중에서 임명되었으나  당시 좌의정 아계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쪽이었고 영의정 유전 역시 중립이라고 하지만 영남사림파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우의정 정언신은 동래 정씨로 정여립과 9촌지간이었습니다. 이에 정언신이 탄핵되고 그 자리에 정철이 대신한 것입니다. 이 때 정철은 우의정이자 위관으로 임명되어 정여립의 반역사건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동인에 억눌려있던 지라 이 사건은 철저하게 기호사림파 인사들을 제거하고 숙청하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참혹한 국문이 수반되었으며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고문으로 사람을 죽이는가 한편 정철하고 앙숙이었던 이발은 물론, 그의 아들은 매를 맞다가 죽었고 노모는 압슬이라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정철은 사갈(蛇蝎)같은 성품으로 귀역(鬼蜮)같은 꾀를 품고 전번 역변을 만났을 때 들어와 조정의 권력을 쥐고서 국가의 화를 계기로 감정을 풀 소지로 삼았습니다. (중략) 아래로 위포에 미치기까지 널리 하수인을 두어 그물을 대대적으로 쳐서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모조리 잡아 없애고 나라에 함정을 파서 사람들을 빠뜨릴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선조실록』

역사에서 기축옥사로 불리는 사건으로 인해 정여립과 관련한 많은 인물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귀양이 보내졌습니다. 이 일로 진보적인 지식들의 씨를 말렸으며 입을 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조 역시 이러한 상황을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정철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던 지라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북인인 이산해만으로는 정철을 견제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류성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류성룡 체제가 갖추어졌습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를 아꼈는데 인빈의 아들 신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분위기는 광해군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세자 책봉문제로 왕에게 건의하게 되었는데 그 날, 정철하고 유성룡이 어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정철이 꺼낸 말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선조가 의중에 있던 신성군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류성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철에게 세자책봉문제를 건의한 것은 류성룡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서는 정철이 말을 꺼냈고 선조의 마음과 달리 말하는 것에 대해 선조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정철이 주색에 빠져있어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며 정철을 파직했습니다. 분명 기축옥사는 정철이 주도했지만 선조가 가만히 있으면서 이를 부추긴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철을 이용하여 동인들의 기세를 꺾더니 이제와서는 정철을 내치기로 한 것입니다. 정철은 이후 명천으로 유배당했다가 다시 강계로 이배되었습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기축옥사의 중심에 있던 것은 정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논란이 커질 줄은 몰랐다는 정철은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가 위관이 되기로 했을 때에 주변에서 말렸다고합니다. 결국 정여립 사건은 수많은 희생자만 양산하고 진실은 밝히지 못한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철의 개인적인 권력욕만으로 이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선조에게 이용당하다가 더욱 일이 커진 것이니 알 수 없으나 이 일로 10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희생당했으며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임진왜란에 활약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도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과 서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으며 기축옥사 당시 수많은 천재 선비들이 죽었으니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축옥사 때 정언신만 살았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병조판서 황정욱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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