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제도

2023. 2. 15. 18:3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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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 속에 든 시와 책이 몇 백 짐이던가/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지 묻지를 마소/ 60년 전에 스물셋이었네. 
이 시에 표현된 난삼이라는 의복은 과거합격자들이 걸치는 예복으로 이 시는 조선 영조 대에 과거에 합격한 조수삼이라는 시입니다. 과거에 합격한 감격을 표현한 것인데 여기서 눈에 띄는 구절은 바로 60년 전에 자신의 나이가 스물 셋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합격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83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83임에도 과거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볼 적에 나이제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경국대전』에서는 과거응시자에 대한 나이와 신분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죄를 범해 관직 임명이 영구히 차단된 자,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했거나 행실이 방정치 못한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은 과거를 보지 못한다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얼들에게도 과거를 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한이 재밌는 것은 행실이 방정치 못한 부녀자의 자손에게도 과거를 제한했다는 것인데 조선이 성리학질서를 표방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조수삼은 아예 이름없는 인물은 아니었는데 그는 당대 뛰어난 시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김정희, 박제가, 박지원, 이덕무하고 문장을 나눌 수 있었고 따라서 그가 응한 과거시험은  진사시로 문장을 평가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조선 현종 5년인 1664년 8월 20일 함경도 길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는 장면을 그린 그림

이러한 과거시험에서 문과는 대과와 소과로 나누었습니다. 소과는 다시 진사시와 생원시로 나누었는데 이 진사시와 생원시에서 각각 100명 씩 모두 200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소과의 합격자는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대과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가 있으며 초기와 복시는 각각 초장과 중장, 종장의 3단계를 거칩니다. 그리고 여기서 뽑힌 33명이 임금님 앞에서 시험을 보는데 그것을 전시라고 하며 여기서 순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과의 초시에서는 240명을 뽑았는데 여기서는 지역에 따라 인원수가 할당되었습니다. 그렇게 선발된 240명 중에 33명이 경쟁하여 순위를 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종 합격자들은 갑과 세명, 을과 일곱 명, 병과 스물 세 명이 되고 갑과 1등이 장원급제가 되었고 을과 1등은 최종 4등이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장원급제하고 장원급제자는 종 6품의 자리에 올랐고 나머지는 종 9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년시는 3년마다 한 번씩 있었으므로 장원급제자에게만 허락되는 파격승진의 기회는 3년마다 1명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들의 평균연령은 36.7세였으며 최연소 합격자는 고종 때 15살의 이건창, 최고령은 조수삼이 아닌 고종 때 인물 정순교로 86살이었다고 합니다. 이건창은 15살이라는 나이로 합격했지만 워낙 어렸던 탓에 4년 지난 후 19세에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조선 역사상 최고령으로 합격한 정순교가 치른 시험은 대과가 아닌 6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특별시험인 기로과였습니다. 이 기로과는 왕, 왕비, 대비, 대왕대비 등 환갑이나 칠순을 경축하기 위해 60세 이상의 선비를 대상으로 한 과거제였다고 합니다. 『춘향전』이라는 소설에서 이몽룡이라는 인물은 춘향이와 연애를 하고도 1년만에 장원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남원으로 돌아옵니다. 3년마다 치루어지는 식년시는 그 과정에 복잡하여 소설은 단지 소설일 뿐, 과거급제는 힘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부정기시험으로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을 때 과거를 치렀는데 국왕이 문묘에 참배한 뒤 성균관 유생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에게 급제를 주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험 중에 춘당대시라는 것이 있어 이몽룡이 이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으니 소설 속 이몽룡의 과거합격과정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도 이몽룡이 엄청난 천재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가족들은 물론 마을사람들, 사또까지 와서 축하해 주었다고 하니 명문대 합격한 뒤, 거대한 현수막을 걸어두듯, 과거급제는 마을의 경사였습니다. 

과거급제를 축하하기 위한 어가 행렬

이러한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사서삼경을 기본으로 『사기』, 『자치통감』같은 역사서를 비롯, 여러 문학작품을 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장들을 암기하고 시험에서 출제된 문제에 따라 자기가 외운 문장들을 응용하여 논술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과거합격이 집안의 영광이었던 것만큼 명문가 집안에서는 계속하여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기 위해 합숙훈련과 모의고사도 실시했으며 과거 합격자에게 장학금이 수여하여 동기의식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율곡 이이가 아홉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급제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함이 아닌 부모를 기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고 나아가 집안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밥먹듯이 과거에 합격한 이율곡과 달리 본래 과거시험은 어렵기도 너무 어려워서 나이가 50이 넘어도 합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과거 시험의 문제로는 태종 7년(1407)에 있었던 “의관(衣冠)의 법도는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는데, 오직 여복(女服)만은 오히려 옛 풍속을 따르고 있으니 이것은 과연 다 고칠 수 없는 것인가” 혹은  “관혼(冠婚)·상제(喪制)도 또한 다 중국의 제도를 따라야 할 것인가?”란 문제도 출제되었습니다. 한편 세종 16년인 1434년에는 “혼례란 인륜을 바로잡고 음양의 이치를 따르기 위한 것이나, 우리 풍토와 습속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며 데릴사위에 대해 묻기도 했습니다. 세조 대에는 윤달을 정하는 기준을 물었고  “옛날의 성인이 오음(五音)을 제정하였는데 후세에 와서는 칠음(七音)의 학설이 있으니, 옛것을 따르면 어떻겠으며 지금 것을 따르면 어떻겠는가?”라고 하여 음악과 관련한 질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신하들이 벼슬길에 나설 때에 먼저 속임수를 쓰면, 양심을 저버려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남의 재주를 빌려 답안을 쓰거나 남을 대신해 답안을 써 주는 사람, 중간에서 서로 통하게 하는 사람은 곤장 백 대와 징역 3년의 엄벌에 처하십시오.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 주는 등 부정행위를 돕는 관리도 똑같이 엄벌에 처하십시오.” 『세종실록』
과거시험에서 쓰이는 부정행위로 쟁접이 있었으니 이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었습니다. 당시는 문제를 인쇄하여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빨리 보고 답을 빨리 낼 수 있어야 했기에 현제판 근처가 명당자리였고 따라서 힘 있는 사람들은 선접군이라는 사람을 동원하여 이들 간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핞편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협서가 성행하여 16세기 이수광은 과거장이 마치 책가게와 같다고 하였으며 전문적으로 답안지를 대신 지어주는 거벽, 글씨를 대신 써주는 사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장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거나 시험과과 응시자가 미리 짜고 부정행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영조대에는 합격자 발표 다음 날 합격자를 부른 후 자신이 쓴 답안을 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외우지 못하면 불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한편 1677년 숙종 대에는 응시생 상당수가 타인글을 베끼거나 대리시험을 친 것을 적발하여 결국 합격을 취소하는 파방을 결정하였습니다. 파방이란 조선 시대 과거 시험 과정에서 시관(試官)의 잘못이 있는 경우 과거 합격자의 발표를 취소하는 것입니다. 한편 부정행위를 저지른 자에게는 정거, 즉 다시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합격후에라도 발각이 되면 삭과라 하여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임원준이란 사람은 1444년 생원시험 때 남의 글을 베껴서 적발되었기 때문에 정거처분을 받았는데 임금에게 반성하는 상소문을 올리며 노력한 결과 세조 즉위 후에 사면되어 1456년 식년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응시자의 신상을 적은 부분을 가려놓는 봉미법, 답안지를 서리가 붉은 글자로 다시 적게 하여 이 사본으로 채점하는 역서법이 활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험을 보고 나면 내는 답안지를 시권이라 하였으며 과거를 치르고 나면 가장 우수한 답안지를 가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답안지가 아래의 답안지를 누르는 형세가 되니 여기에서 압권이란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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