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막을 수 없었나.
2023. 2. 16. 20:0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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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7년간에 걸친 이 전쟁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전쟁을 거친 조선은 가장 큰 피해를 입고도 왕조가 교체되지 않았지만 이미 침체기를 겪고 있던 명은 더욱 약해져 청나라로 교체되었고 일본도 이후에 도쿠가야 이에야스에 의해 새로운 막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이렇듯 동아시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준 이 전쟁, 임진왜란은 과연 조선은 막을 수 없었을까. 사실 전쟁을 일으키려는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1591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보고서가 올라옵니다.
‘왜적인 반드시 침범할 것이오니 대비책을 마련하심이 옳을 듯 하옵니다.’ -정사 황윤길-
‘일본에서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정사께서 과장되이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잘못인 듯 하옵니다.’ -부사 김성일-
이에 서장관 허성이 이야기합니다.
‘정사의 말씀이 옳은 듯하옵니다. 분위기가 범상치 않아 …….’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었습니다.
‘눈에는 광채가 있으니 담력과 지력을 겸비한 사람 같았사옵니다.’ -정사 황윤길-
‘아니옵니다.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울 게 없사옵니다.’ -부사 김성일-
그럼 과연 김성일의 보고는 옳았을까.
이에 류성룡은 황윤길에게 만약 병화가 있으면 어떡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나 역시 어찌 왜적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단언하겠습니까. 단지 황윤길의 말이 지나쳐서 민심이 혼란할까 보아 그랬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판은 그의 일본을 향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의 의미를 조선과 일본에서 해석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조선은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파견한 것인데 히데요시는 이들을 자신에게 항복하러온 조선의 사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사실 중간에서 다리역할을 했던 쓰시마의 도주 소 요시토시의 역할로 인해 이런 오해가 생겼는데 그는 어떡해서든 전쟁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 때문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통신사에게 문서를 주었으며 그 내용은 조선의 국왕은 입조할 것이며 명나라를 칠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으로 이익을 내던 쓰시마섬의 도주 소 요시토시는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명에 갈 길을 빌려달라는 식으로 문장을 바꾸었지만 이러나 저러나 조선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습니다. 김성일은 통신사로 가면 쓴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오랑캐는 바다 동쪽 구석에 있는데 성질이 교만하고 지역도 별스럽다. 그들의 마음은 이리요, 소리는 올빼미다.’
사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당시 김성일만의 것은 아니었듯 싶습니다. 당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실질적인 지리정보서라기보다는 당시 조선이 갖고 있던 관념이 투영된 결과로 볼 수 있는데 당시 조선이 존중하고 있던 청나라에 대해 상당히 크게 표시해놓았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작게 표현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 대한 무시가 깔린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당시 김성일은 동인이고 황윤길은 서인이므로 당파싸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으나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한 허성은 동인이었습니다. 허성은 당파보다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따라 가감없이 선조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럼 이러한 상황에서 판단은 선조의 몫이고 2:1인 상황에서 전쟁에 대비했어야 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하지만 기축옥사를 통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조선을 한바탕 혼란을 빠뜨린 적이 있는 선조가 다시 한 번 민심을 동요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센코쿠 시대의 가장 출세한 인물로 유명한데 서민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자리인 관백의 자리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는 일본역사를 통틀어 가장 출세한 일본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조선에 전쟁을 암시하는 국서도 보내왔습니다.
‘삼가 나의 사적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가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인하여 나에게 적심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00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의 정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가 되어 입조한다면 원려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사실 이러한 내용의 국서는 조선 뿐만 아니라 스페인령의 필리핀과 태국, 대만, 류큐 등에도 보냈고 심지어 인도의 작은 주인 고아에까지 글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 이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진출의 야망에는 그가 사용한 부채에도 나타나 있으니 그 부채에는 일본이 아주 크게 그려져 있는데 명과 그 크기가 비슷했으며 세 개의 빨간 점을 찍어 목표물을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대륙침략의 야육을 일본에 19세기 말이 아닌 그보다 300여 년이 앞서 16세기 말에 내비친 것입니다. 하지만 두 시기에는 상황은 좀 달랐습니다. 19세기말은 청은 그야말로 종이호랑이로 그 실체가 드러나 유럽열강들에게 여러 이권을 뺐기던 시기였습니다. 16세기말 명은 조금씩 침체의 기운이 있었지만 19세기말과 같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수군에 있어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대륙침략은 19세기 정세와 비교해보면 좀 무모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그는 일본에서 출세의 아이콘이라 불릴 만큼 출신이 미천했는데 그에 따라 지지기반이 부족했고 따라서 다른 다이묘들을 휘어잡을 업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카리스마도 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조선정벌과 대륙침략이라는 것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드높이고 일본의 영주들을 자신의 휘하로 만들 생각이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다이묘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을수도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항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능력의 한계로 인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전투를 하는 것에는 능숙했지만 장기간 국가경영하는 데에는 미숙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일본의 오랜 혼란을 잠재우자 불만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되돌릴 겸 그가 다시 전투사령관이 되어 임진왜란을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연결되는 것이 바로 돈 문제입니다. 당시 히데요시는 ‘만약 명을 정복하면 일왕은 북경에 앉히고 나는 영파로 가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영파는 당시 국제 은 무역의 중심지로 당시 은 생산량 세계 2위에 있던 일본이 해금정책을 실시하던 명나라를 쳐 은무역을 독점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일본의 무사들이 해금정책을 피해 밀무역으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어찌되었든 일본의 침략은 예정되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밖으로 나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임진왜란을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적어도 당시 조선의 임금 선조가 임진왜란에 있어 비난을 화살을 피하지 못하는 건 부산에 있으면서 일본사신을 맡고 있던 청백리 선위사 오억령이 계속해서 일본의 대규모침략정보를 보고하였으나 선조가 그를 세상 시끄럽게 한다며 그를 파직시켰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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