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조선의 반격 그리고 의병의 활약

2023. 2. 18. 08:4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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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해 묘사한 수조병풍도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의 의도대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1592년 6월 13일 조선수군은 판옥선 24척과 함선 15척을 가지고 여수를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18일에는 원균이 합류하였습니다. 당시 정찰대는 거제 옥포에서 왜선을 발견하고 신기전을 쏘아 이를 알렸습니다. 당시 옥포에는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왜선 50여 척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곳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이를 지켜보고만 있더 조선 수군, 왜적이 모두 배에 승선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왜선이 가까이 다가오자 조선의 수군은 왜군의 100m의 조총 사거리 밖에서 함포사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정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이순신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수군에 왜선 26척이 불타 수몰되었습니다. 왜군은 사상자가 4000여 명에 달했고 조선은 단 한 명이 부상을 당했을 뿐입니다. 조선수군이 거둔 첫 승리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생각은 육군이 올라가면 해로를 따라 보급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승리로 이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로로 보급이 움직일 수도 있지만 해로와 비교했을 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바다를 통한 길이었습니다. 비용대비 해로가 저렴하고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여 이를 극복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수군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고니시 장군은 평양에 있었는데 그는 바다를 통해 보급선이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의주에 피난가 있던 선조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감은 조선의 수군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때마침 겨울에 찾아들어 이는 일본군들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수군의 승리에는 수군 자체가 온전히 있었던 데에 있습니다. 전쟁 전에 수군의 존폐 여부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갔습니다. 당시 신립은 수군을 폐하고 육군을 육성하여 막아보자는 것인데 수군은 그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당시 장기간 이어진 조선의 평화도 조선 수군의 무용론에 부채질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비쳤고 이를 선조가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이순신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전쟁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합포/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등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에는 한산대첩 같은 대승리도 포함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수군은 섬나라라는 입지적조건과는 다르게 수군이 크게 육성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100여 년간 전쟁을 치루었지만 대부분 육상전투였고 해전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거북선과 판옥선은 대규모 화포로 무장하고 있어 화력에 있어 일본의 전함에 비해 우위에 있었고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이 더 해지면서 전투력도 배가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허당 영규 진영


그리고 육지에서 승리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진주에서의 승리는 대첩이라 불리며 일본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일본은 이 전투에서 10000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300여 명에 지휘관을 잃었습니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조선의 병력은 3800여 명으로 이도 관과 민이 합쳐진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호남지방을 장악하여 보급창고를 얻겠다는 일본군의 계획은 다시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한 것은 바로 의병들의 활약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은 김해를 지킨 네 명의 의병 김득기, 류식, 송빈, 이대형이며 이들을 사충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을 포함한 1천 여명의 백성들은 김해성에서 1만 3천 여명의 일본군을 상대하였습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일본군은 해자를 건너지 못했고 두 번째에는 무기와 사다리를 들고 해자에 뛰어들어 일부가 성벽을 기어올랐으나 돌을 던지고 물을 붓는 의병들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당시 김해부사가 진남문에서, 초계군수가 해서문에서 그리고 의병장들이 해동문과 공진문에서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전투에서 조선군은 거센 저항을 하였으나 성안의 식량은 점차 바닥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조여오는 상황에서 초계군수 이유검은 해서문을 지키다가 도망갔고 김해부사 서예원도 도망갔습니다. 이에 조선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이대형과 김득기는 총대장직을 맡아 결사항전을 하다가 결국 패배하였습니다. 하지만 한나절 만에 끝난 부산포와 동래성에서의 전투와는 달리 이 전투는 4일을 버티며 일본군이 진격할 시간을 지연시켰습니다.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 된 4월 22일에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0여 명의 노비를 데리고 일으켰으니 그 시작은 미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양반들을 설득하며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늘렸고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에서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였습니다. 이후 현풍, 영산, 진주 등 낙동강 일대에서 공을 세우며 육지에서도 승전보를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왜군의 진격이 차단되고 10월에는 1차 진주성 싸움에도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의 부대는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하여 진주성 대첩에 기여한 것입니다. 곽재우는 기본적으로 유격전을 구사했으므로 일본에서는 이들을 일본의 군량을 훔쳐가는 산적이나 도적떼처럼 표현하였습니다. 그렇게 곽재우가 활약한 경상도에 또다른 의병장 정인홍이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57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평소 부음정에서 양성하던 문인집단을 중심으로 관군, 토호들의 노비를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낙동강 일대에서 연합전선을 만들며 왜적의 진로를 막았습니다. 이로 인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그리고 호남의 곡창지대를 수호하는 데에 공헌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의병장 조헌 선생과 승장 영규대사가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이 충남 금산 연곤평에서 1만5000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1558년에 장원급제한 바 있는 고경명이 1592년 5월 20일에 의병장이 되었고 6월 27일 충청도 은진까지 진군한 뒤에 7월 9일 금산성을 공격해서 처음에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7월 10일 전투에서 둘째 아들과 함께 순국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축옥사로 인해 금강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명대사도 있습니다. 그는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군과 협력하며 평양회복을 도왔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서 전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와 나눈 문답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당시 자신의 진에 찾아온 유정에게 가토가 조선의 무엇이냐고 묻자 유정은 이에 조선의 보배는 조선 것이 아니라 일본 것이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하여 가토가 그 보배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사명당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오." 하고 말했습니다. 즉, 조선에게 최악의 적장의 머리를 베어바친다면 부와 명예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가토가 놀라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문부는 1588년에 식년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한 사람으로 1590년 사헌부 지평, 1591년에는 함경도 병마 평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은 선조의 아들로 본래 병력을 모아야 했는데 오히려 관리와 백성들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합니다. 이에 국경인, 국세필, 정말수 등을 이들을 잡아 오히려 왜군에 넘기자 당시 함경도에 있던 정문부는 의병을 일으켜 이들 일당을 처리하고 이후 열세인 병력으로 길주성을 포위하고 왜군을 상대로 2번의 승리를 거두며 함경도 지역에서 왜군을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북관대첩이었습니다. 

함경도를 수복하는 북관대첩을 그린 창의토왜도

그리고 1592년 12월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이 병력 4만 여명을 데리고 조선을 압록강을 건너왔습니다. 사실 명나라가 이러한 지원을 한 데에는 아무래도 자국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조선땅을 장악하면 그들에게도 위협이 되었습니다. 당시 명나라 군대는 북병과 남병으로 구성되었고 특히 남병은 중국남부지역의 병력으로 일본군과 싸워본 경험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왜군을 상대하는 이른바 절강병법을 사용하였으며 조며연합군은 평양성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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