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기의 명재상 류성룡

2023. 2. 20. 08:4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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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성룡이고, 자는 이현(而見)이며 성은 류(柳)씨이다. 공의 선조는 풍산현 사람이다. 군수를 지낸 공작의 손자이고, 관찰사를 지낸 중영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 총명하고 박학하였으니, 도산에서 이 선생(이황)을 처음 뵈었을 때 이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지이다.”하였다.’ 허목, 『기언(記言)』「서애유사」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칠 때 큰 역할을 했던 재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21세 때인 1562년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가 하늘이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그는 4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고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 관서를 두루 거치고 이조·병조·형조의 일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결정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바로 당시 임금인 선조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초수한 것입니다. 이에 대신들은 부당한 인사라며 반대하였습니다. 아무래도 한 번에 일곱 품계를 올리는 것은 전례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순신을 천거한 인물이 바로 류성룡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선조임금이 류성룡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더불어 행주대첩의 권율장군을 의주목사에 천거한 사람도 바로 류성룡이었습니다. 당시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 활약할 인재를 등용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입니다. 
이순신과 류성룡이라고 절친이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류성룡이 이순신보다 세 살 나이가 많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사형제중 셋째였고 류성룡은 이순신의 바로 윗 형인 요신과 친구관계였습니다. 따라서 류성룡과 이순신은 한 동네에서 살았고 아마 이순신에 대해 류성룡은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 어렸을 적부터 알았던 친분으로 그를 조정에 천거한 것일까. 이순신은 일찍이 함경도 최북단에서 부대장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전라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활동하고 그러면서 류성룡은 이순신은 계속 주시했습니다. 그런 결과 류성룡은 아마도 이순신이야말로 전라좌수사 정도 되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전라좌수사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줄인 말로 지금은 전라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누지만 조선시대에는 좌우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전라좌수사는 전라좌도 수군의 총 책임자로 이 직책의 부임지는 바로 여수입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그가 읽은 책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 중 하나는 류성룡이 보내준 책으로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하여 이순신은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기록되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저술이다.’라는 느낌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류성룡은 사람을 천거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한 것입니다. 
이런 류성룡에 대한 선조의 신뢰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592년에는 좌의정 겸 병조판서, 그리고 평안도 도체찰사였습니다. 도체찰사는 국가비상시 왕의 명을 받아서 활당된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벼슬입니다. 그리고 임지왜란기를 겪으며 영의정 겸 훈련도감 도제조 그리고 3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으니 충청과 전라, 경상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1596년에는 4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신뢰는 아마 류성룡과 선조의 관계에 있을 것입니다. 류성룡의 부인은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인 이경이라는 여인으로 따라서 류성룡과 조선왕실은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류성룡과 선조가 자연스런 연결고리가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류성룡과 이순신

앞서 이야기했듯이 류성룡이 천거한 사람은 이순신 외에도 권율이 있습니다. 그는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사실 문관이라고 합니다. 정5품 호조정랑이었던 권율은 류성룡의 천거로 정3품 의주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율은 이 곳에서 군사적인 능력을 쌓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얼마 안 있다가 해직되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권율은 전라도 광주목사자리에 있었습니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감싸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측에서 이상한 정보를 흘려 가토 기요마사 군대에 대한 진로에 대한 것을 알려주었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믿고 이순신에게 처리할 것을 명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정보를 함정이라 생각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졸지에 왕명에 불복한 꼴이 되어버린 이순신은 이 일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정탁이란 사람은 이순신을 변호하였는데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 극형에 처하려고 할 때에 어려운 시국에 명장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한 것입니다. 
류성룡은 전략전술에서도 탁월했는데 명나라군이 지원하여 평양을 공격할 때에 첫 번째에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일본군이 주민들을 매수해 간첩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는 일벌백계로 다스려 2차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한편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에는 명군 장수들에게 수륙양면잔전을 제안했는데 이 때 명군의 일부를 해로로 한강에 직접 투입하여 강의 남안을 장악, 일본군의 퇴로를 남, 북한강 쪽으로만 허용해 충주에 이르는 긴 협곡에서 격멸작전을 하자는 것입니다. 당시 명나라 장수들은 감탄했지만 명총사령관 이여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군이 임진강이 반만 언 것을 보고 진군속도를 늦추려 하자 류성룡은 산에서 칡넝쿨을 거두어 대형부교를 만드는 일을 직접 지휘하여 5만의 군사의 도강을 돕기도 했습니다. 
한편 류성룡은 전쟁 중에서도 직업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새로운 화포와 무기를 제작해 무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국경지역인 중간진에 시장을 개설하고 요동지역 곡식을 수입하도록 하는 것을 제안하였으며 이를 통해 군량을 마련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그는 병역제를 개편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당시 양반과 천민은 병역이 면제되었는데 따라서 병사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류성룡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군인이 될 수 있는 속오군제도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면천법도 실시하였는데 그러면서 그는  “일본군의 수급을 베어오면 천민도 양민이 될 수 있다”고 약속하자 많은 천민과 노비들이 일본군의 머리를 베어 들고 군영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1598년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무고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 일은 정응태가 왜란 중에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이 문제가 되었는데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땅은 옛 고구려 땅이어서 조선이 다시 회복해야 하고 따라서 조선이 왜병을 불러들여 함께 명나라를 치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본보기로 조선의 국왕과 신하를 문책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명황제와 조정에서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이 일을 설득하기 위해 대신을 보내야 했습니다. 선조는 이 일을 류성룡에게 맡기려 했으나 류성룡은 이 일을 거절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명나라 자기네들끼리의 일인데 우리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당시 류성룡은 고령이었으므로 사신으로 가는 여정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선조는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국정운영을 하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꼬투리를 잡아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류성룡이 안간다고 하자 이 일을 빌미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선조의 의중의 안 북인들이 선조에게 류성룡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른바 ‘주화오국’이란 말이 나온 일로 류성룡이 속한 남인의 반대 당파인 북인이 ‘류성룡 등 일부 관직 요인들이 일본과 친화적으로 지내며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선조는 이 상소문을 받아들여 류성룡을 파직시킵니다. 가장 어려운 때에 재상으로 여러 가지 정책을 제안하고 나라의 위기에서 구하려 했지만 슬슬 조선이 안정을 찾아갈 기미를 보이자 선조에게 내쳐진 것입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선조의 부름을 거부한 채 징비록 집필에 힘을 쏟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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