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2023. 2. 21. 08:5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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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에 집필한 책으로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에 나오는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란 문장에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문장의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는 의미로 임진왜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의 일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규명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는데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중요한 직책을 맡았지만 전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반성이 묻어 있는 책입니다. 이후에 임진왜란과 관련된 책은 더러 있지만 이 책은 당시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의 시선에서 바라봤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599년 2월 집필을 시작하여 1604년에 마친 책으로 이 책이 처음 간행된 것은 1647년으로 당시 16권 7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류성룡이 집필하면서 당시 조선의 국방상황과 명과 일본에 대한 조선의 외교자세, 그리고 일본군의 장단점을 평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수군의 제해권(制海權) 장악 관련 전황, 조정 내의 분열,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신,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상당수 관료와 군인들의 모습들을 담았으며 당시 조선이 전쟁준비에 소홀했고 그로 인해 맞게 된 참담한 결과를 담담하게 적었습니다. 이 책은 조선입장에서 극비에 가까운 책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책은 집필한 지 100년도 안되어 일본에서 『조선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발간된 『조선징비록』은 조선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여기에는 17세기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유학자인 가이바라 에키켄의 서문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다룬 수많은 책 중에 가장 믿을만한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킨 바 그 영향을 받은 책들이 줄줄이 일본에서 발간되었기 때문입니다. 30여종 이상의 징비록이 번역 출간되어 징비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징비록』의 흥행 이후에 임진왜란에 다양한 기록물이 쏟아졌으며 내용도 풍부해졌으며 삽화가 그려진 책도 출간되었습니다. 그만큼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관심이 『징비록』으로 이어진 측면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 한 번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야망이 징비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임진왜란이 일본에서 대대적인 이루어진 몇 안되는 해외원정 중 하나였고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당대 일본일들의 관심이 엄청났고 따라서 『징비록』은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임진왜란에 대한 호기심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서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일본에서 『징비록』의 영향을 받아 발간된 책 중에 『에혼다이코키』는 ‘그림으로 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 6편과 7편은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이 바로 『징비록』의 영향을 받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조선정벌기』라는 책에서는 총에 맞은 이순신 장군이 웃으면서 총알을 빼내는 장면이 있다고 하니 당시 이러한 이순신에게서 일본인들은 경외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순신이 전투하던 때의 일이다. 앞서 싸움을 독려하던 그가 총알을 맞았다. 피가 어깨에서 발꿈치까지 흘러내렸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박힌 총알을 빼냈다. 칼로 살을 가르고 5,6센티미터나 박힌 총알ㅇ르 빼내는 동안 곁에서 보던 사람들의 얼굴은 까맣게 변했지만 태연히 말하고 웃는 모습이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징비록』
이러한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본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이전까지 일본은 자신의 군대가 가장 잘 싸웠고 명나라가 그 다음이었으며 조선은 명나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패망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징비록』이라는 확실한 기록을 통해 조선에도 명장이 있었고 임진왜란에 대한 자세한 기록물로서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징비록』의 일본 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땅에서 벌인 명나라와의 전쟁이라는 인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꼽듯이 그들이 벽제관 전투, 울산성 전투, 사천성 전투를 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조선군만을 상대한 전투는 이러한 대첩에서 빠졌는데 아마 『징비록』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에 대한 진실을 여전히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징비록』에서는 이순신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에 활약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징비록』에서 이순신에 대해 더욱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지략과 담력이 있었다.’고 서술하였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도 『징비록』에 적혀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해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 모든 병사가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해 계책을 결정한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원균은 그 집에 첩을 데려다가 함께 살면서 이중울타리를 쳐 놓아 장수들조차 그를 보기 힘들었다. 또한 술을 좋아해서 술주정이 다반사였다. 군중에서는 형벌이 무시로 이루어져 병사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왜놈들을 만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네그려.”’
이렇듯 『징비록』에서는 이순신과 더불어 원균에 대해서도 적고 있으니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초기에 연전연패를 하였으니 당시 재상으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류성룡이 져야 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가 탄금대 전투에 대해 비판하는가 하면 전투에 대해 묘사를 생생히 하였으며 주요 인물들과 행동, 사건을 긴밀하게 엮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렇듯 임진왜란을 가장 잘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징비록』입니다. 그런 그는 적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에게도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서도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류성룡의 평가가 이 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임진왜란의 분위기를 한층 느낄 수 있도록 지도도 첨부하였습니다. 단순히 지명만 열거하여 독자들에게 애매한 상상에 맡기기보다는 생생한 사료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징비록』인데 한양도성진공로를 예를 들면서 가토군의 용인 통과, 고니시 군의 양평우회, 구로다 군의 충청도 관통 등을 알 수 있도록 지도를 첨부한 것입니다.
한편 『징비록』에 대해서 비판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자신이 이순신은 천거하고그가 활약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적어놓았지만 이순신이 막상 조정에서 모함을 받고 선조는 원균을 편애할 적에 류성룡도 이순신의 모함에 가담하였으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서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하자 다시 그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류성룡은 이순신과 더불어 원균을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잘못된 전쟁 수행으로 조선에 많은 손해를 입혔는데 막상 그를 추천한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자신이 잘못된 사람을 천거했다는 그런 반성의 문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91년에는 황윤길과 김성일이 사신으로 다녀와 왜군의 침략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류성룡’은 침략할 리 없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징비록』이 반성과 성찰에 과한 책인데 이러한 부분을 숨긴 것은 다소 아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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