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과 칠천량 해전

2023. 2. 19. 08:4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칠천량 해전 상상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원균은 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좌병사를 지낸 무신으로 경상우수사 시절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방적으로 패주하였다가 이순신의 원병 합세로 연승에 가담하였습니다. 하지만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으며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자 이에 반발하였고 이듬해 12월에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난폭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평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조선, 명, 일본 사이에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화협상이 틀어진 데에는 일본 측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협상의 대표자로 나선 것은 명의 심유경, 그리고 일본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나섰습니다. 당시 명의 송응창은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을 내세웠으나 일본에서는 명나라 황녀를 일본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거나 무역증서제 부활, 일본과 명 양국대신이 각서 교환,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보낼 것, 그리고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석방하고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한 바 사실상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4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이루어진 강화교섭은 결렬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침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1597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이 다시 조선에 상륙하였습니다. 이른바 정유재란입니다. 이전의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목표한 것은 조선을 점령하고 명나라로 나아간다는 것, 하지만 정유재란에서는 좀 더 현실적인 목표로 수정합니다. 경기, 충청, 전라, 경상의 4도를 확보한다는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1차 전쟁이 실패한 것은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그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던 1597년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한 통의 장계를 보냅니다. 그것은 요시라라는 사람에게 들었다면서 가토 기요마사가 1597년 1월 4일에 대마도에 도착하고 조선으로 건너갈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군을 보내 이들을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사로잡으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이순신은 정보의 출처와 의도가 의심스럽다며 출동명령을 거부합니다. 설사 이 정보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가는 가토를 잡기 위해서는 부산근해에 매복을 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육지에 상륙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군이 부산을 장악하고 있던 때로 정박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병력을 가지고 가면 적들이 알게 되고 적게 데리고 가면 기습공격을 당할 우려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가토가 부산에 상륙함에 따라 조선에서는 가토를 잡을 기회를 날렸다면서 분통을 터뜨렸고 그 책임을 이순신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이 때 조선조정의 분위기는 험악했으니 이것은 단지 이순신이 임금의 명을 거부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던 상황에서 임진왜란 피난 당시 선조에 대한 바닥친 민심도 확인했던 차였습니다. 당시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조선을 구해준 이를 명나라로 보고 아니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2월 4일 사헌부는 높은 벼슬을 받았음에도 싸우지 않는 이순신은 잡아야 한다고 하였고 2월 6일 선전관을 보내 이순신을 잡아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3월 13일에는 사형선고까지 하였으나 그래도 이원익과 정탁이 이순신을 변호하여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습니다. 

칠천량 해전도 주변 지리

그 사이 원균은 1597년 3월 8일 거제의 기문포에서 일본의 전선들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벌목을 허가받았다는 문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풀어준 다음 배를 타고 돌아가는 그들을 공격하다 반격당하면서 고성현령 조응도가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군도 피해를 입었지만 그 피해사실을 숨기고 원균은 3척의 배를 포획하고 일본군 47명을 사살했다는 장계를 올립니다. 이후의 조사로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고 일본은 미리 약속하고 나무를 베러갔는데 공격했다면서 항의하자 조선조정은 이에 대해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원균은 육군을 동원하여 안골포와 가덕도의 일본군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권율은 반대의 뜻을 조정에 알렸습니다. 하여간 조정은 원균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의구심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원균 입장에서는 이 전투에서 질 수도 있기에 수륙양면작전을 제안한 것입니다. 당시 권율은 수군은 싸울 생각 없이 모든 전투를 육군에 맡기려 한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보고싸움은 상급자인 권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1597년 6월 18일 새벽, 100여 척의 판옥선이 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수군이 안골포로 진격하자 저항하던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흩어졌습니다. 해전을 뒤로 한 채 일본 수군은 육지에서 저항하다가 조선수군이 퇴각하자 다시 배에 올라타 공격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방면으로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7월 4일 다시 출격하게 되었습니다. 7월 7일 인근의 다대포에 도착한 조선수군, 그리고 이를 일본군이 발견합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전처럼 육지로 도망쳤습니다. 이 때 조선 수군은 절영도에 도달했는데 대마도에서 들어온 1000여 척의 일본 배와 맞닥뜨렸으나 이 때에도 일본수군은 피하고 오히려 조선수군은 심함 풍랑과 바람을 만나 7척의 배가 표류하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모포에서 5척의 배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원균과 권율장군사이에 다시 의견마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원균에게 출격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병력은 판옥선이 188척, 노를 젓는 격군이 1만 3200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절영도에서 선박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150척에서 160척의 선박이 존재했습니다. 

칠천량 해전도

조선수군은 일본군을 찾아 공격명령을 내렸으나 왜선들은 달아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휴식도 취할 겸 가덕도에 이르러 정박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수군은 급하게 출격하느라 식량과 식수도 충분치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섬에 닿자마자 병사들은 다투어 내려 물부터 찾았다. 군사들이 허둥지둥 물을 찾아다니는 순간 갑자기 섬에서 왜적들이 나타나 덮쳤다. 결국 400여 군사를 잃고 원균은 칠천도로 갔다.” 『징비록』
이후 적선 500여 척이 추격해오므로 칠천도 일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춘 사이 일본수군이 기습해왔고 이후 일본군의 거센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일본수군은 판옥선을 둘러싸고 화포를 발사할 틈을 주지 않고 소총과 포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조총와 칼에 큰 피해를 입었고 판옥선도 불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작전은 단거리근접전이었는데 당시 그들은 그러한 전투에 특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제도와 칠천도에 가로막혀 탈출이 쉽지 않았고 따라서 조선 수군의 피해틑 더욱 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포위공격에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스스로 물에 빠져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수군은 진해만과 당항포, 그리고 견내량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견내량을 통과해서 한산도로 탈출한 배설 휘하의 12척만이 온전하게 있었습니다. 
사실 칠천량 해전은 해전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전투로 일본수군은 이 전투의 전과로 도도 다카토라가 쓴 『고산공실록』에서는 174척의 판옥선을 격침하거나 포획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원균이 도망치는 바람에 조선수군도 일찌감치 뿔뿔이 흩어져 전투의 참담한 결과에 비해 인명피해는 적었으나 출격을 재촉한 선조와 조선조정, 그리고 원균의 무능함이 대참사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경계를 철저하게 하지 못해 대패를 부른 것은 원균이 지휘관으로서 무책임한 처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육군의 상급자 권율이 수군 지휘관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렸다고 하니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