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과 초기 진행
2023. 2. 17. 20:0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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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가 상륙한 후에 상이 침전(寢殿)에 앉아 계셨는데 침전 서쪽 작은 못에서 푸른색 무지개가 나타나 그 기운이 동쪽을 향하다가 북쪽으로 향하여 중문(中門)을 뚫고 전상(殿上)에 올라 어좌(御座)에까지 접근했다. 상이 피하여 서쪽으로 앉으면 서쪽을 향하고 동쪽으로 피하면 동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선조실록」
궁궐 우물가에서 일어난 푸른 무지개가 선조의 몸을 뒤덮던 날, 일본군이 부산으로 쳐들어온 날입니다.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당시 일본군은 전국통일 과정에서 다져온 군사들로 조선침략을 감행하였습니다.
"왜구가 침범해 왔다. (중략)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오늘날 영도)에서 사냥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조선왕조실록」
부산에 있던 부산진첨사 정발은 절영도에서 사냥중이었는데 처음에 이 배 무리들을 보고 조공선이라 착각했다고 하니 200년간이나 이어진 조선의 평화는 긴장의 끈마저 놓게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587년 부산포에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국왕사라고 하며 조선과 일본의 통교 그리고 임금의 알현을 요구했습니다. 대마도주인 소 요시시게의 가신인 다치바나 아스히로는 당시 50대로 풍채가 크고 머리와 수염이 반백이었습니다. 그는 기존의 일본사신들과는 달리 매우 거만하였습니다. 상주 목사 송응형에게 전쟁을 하다가 머리가 희었는데 당신은 기생들 품에 살면서 머리털이 희게 된 이유가 무어냐고 물었고 현재 구미시인 인동에서는 백성들이 든 창을 보고 너무 짧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양에서는 예조판서가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가 비싼 후추를 땅바닥에 깔아놓자 기생과 악공들이 이를 줍기 위해 달려들며 엉망이 되었으니 야스히로는 이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거의 망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야스히로가 가져온 통교문에는 ‘천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하여 조선조정을 긴장감에 몰아넣었고 이에 일본과의 통교반대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조선에서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생각하고 통신사를 보냈으니 이미 전쟁의 징조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587년 음력 2월 왜구들이 전라도 남해안을 범한 사건이 있었으니 이른바 정해왜변, 임진왜란을 예고편격인 사건도 이미 있던 것입니다. 당시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입하여 녹도권관 이대원이 전사하고 일본인 무리는 가리포로 이동하여 조선수군 병선 4척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인 수백여명도 잡혀갔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전쟁에 대비해 산성도 쌓았고 점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는 과정에서 횡포가 자행되었고 백성들은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바삐 움직이다 사이 조정 내에서는 김성일과 황윤길의 일본에 대한 상반된 보고에 더욱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조선의 방어체제는 진관체제였는데 진관 체제는 각 요충지마다 진관을 설치하여 진관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적을 방어하는 체제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병력이 분산된다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을묘왜변을 계기로 제승방략체제로 바꾸었습니다. 제승방략체제는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에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本鎭)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는 분군법으로 이 체제는 신속한 연락체계로 인해 병력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통신운영은 엉망이었습니다. 4월 13일에 일본군이 상륙하였는데 4월 17일에 이 소식이 조선정부에 도달하였습니다. 봉수제도가 있었지만 효과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1592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이 조선침략을 분비하고 있다고 조선에 알렸으며 조선 정벌군이 나고야에 모이고 있고 3월 1일에 침공예정일이었으나 4월로 연기가 되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송상현은 조선정부에 보고하였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일본 쇄견선은 자취를 감추었고 부산왜관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은 모두 철수한 상태였습니다. 전쟁예고는 끝난 상태에서도 조선정부는 전쟁에 대한 적절한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일본은 한낱 오랑캐라 생각하며 이를 가벼이 여기고 대비에 느슨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준비한 일본군 15만 8700여명, 전선 및 수송선 2000척이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첫 전투가 이루어진 부산, 당시의 상황은 「부산진순절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1만 8000여 명, 그에 반해 조선군은 600~10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허수아비에 붉은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푸른 두건을 씌운 다음, 등에는 붉은 깃발을 지우고 허리에는 칼을 차게 하여 인력을 더욱 많게 보이게 했는데 이를 통해 조선군의 동요를 일으키려 했을 것입니다. 조선도 이에 대해 악사들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여 아군들을 진정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 세 시간 만에 부산진성을 함락되었습니다. 이후 이루어진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성은 협소하고 적병 수만 명이 일시에 성으로 다투어 들어오니, 성중이 곧바로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 「임진동래유사」
당시 성을 지키고 있던 것은 동래부사 송상현, 그는 ‘싸우다 죽기는 쉽고 길을 열기는 어렵다.’고 말하며 항전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왜장은 그의 기백에 감탄하여 그의 무덤까지 만들어주었으나 이각이란 장수는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에 조선정부는 가장 믿을만한 장수 신립을 내보냅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일본군이 한성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 그리고 그는 조령 대신 충주 탄금대에서 일전을 준비합니다. 당시 신립은 북방 여진족과의 전투로 백성들 사이에서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로 그의 특기는 기마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군사 8000명으로 일본군을 상대합니다. 당시 신립의 선택을 두고 적절한 것이었나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갈립니다. 당시 그는 기마전술에 능하다보니 달래강 앞쪽에 있는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에서 전투를 벌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비가 내려 기마부대의 기동력에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탄금대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신립 밑에 있던 8000여 명의 군사는 오합지졸수준이었다고 하니 그의 선택은 배수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탄금대가 가장 탁월한 선택지라고 하는 의견도 있으니 삼면이 강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어 동쪽의 진입로만 막으면 됐고, 봄철에 서풍이 강하게 불어 조선의 원거리 발사 무기에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또 가파른 조령에서는 조선의 주력인 기병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고, 왜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돼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탄금대가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충주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가파르게 북진을 하였습니다. 파죽지세란 말이 어울릴 정도였으며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의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북진을 서두른 이유는 선조만 사로잡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선조는 북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당시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난을 떠났다하여 몽진행렬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선조의 피란은 백성들로 하여금 분노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선조가 피난길에 있을 무렵 파주에 도착했을 때에 파주목사하고 인근의 장단부사가 음식을 겨우 마련하여 수라상을 차렸는데 옆에서 호위하던 하인들이 밥을 훔쳐먹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에 이것으로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봐 장단부사가 도망치기까지 합니다. 선조의 피난은 의주까지 이어졌습니다. 여차하면 요동으로 넘어가서 신변을 보장받겠다고 한 것인데 명나라가 이를 거부합니다. 결국 피난의 종착지가 의주가 되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분노는 담벼락에 왕이 도망간 길을 알려줄 정도였다고 하니 임진왜란과 관련한 조선정부의 대응은 너무 부실했고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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