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의 유모 봉보 부인
2023. 4. 27. 07:5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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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실에서는 왕자나 왕녀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유모를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 하였는데 왕자에게 젖을 먹을 당시에는 그냥 ‘유모’로 불리다가 왕자가 왕이 되면 봉보부인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러한 봉보부인이 시작된 것은 바로 중국의 한나라에서였습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이러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것은 신분 과시용으로 유모제도가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송나라에서는 진종(眞宗)의 유모 유씨(劉氏)를 진국연수보성부인(秦國延壽保聖夫人)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성여왕 때 유모 부호부인이 기록되었으며 고려 우왕이 유모 장씨를 국대부인에 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봉보부인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유모를 '奉保夫人(봉보부인)'에 책봉했는데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17년 되던 해 자신의 유모인 백씨를 종1품 '봉보부인'에 책봉한 것이 시초로 보고 있습니다.
왕과 왕비가 합방을 하면 자식을 낳게 되고 왕비는 만삭이 다가오면 궁궐 안에 마련된 산실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태어난 왕자는 대개 삼칠일, 즉 21일이 지나면 어머니 품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보육을 위해 설치된 보양청이 있는데 왕자는 그 곳에서 왕비의 젖이 아닌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유모의 역할을 왕자에게 젖을 주는 것에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고 안아주고, 돌봐주고 거의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역할을 유모가 맡았던 것입니다.
‘국왕이 세자를 낳으면 사대부의 아내나 사대부의 첩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젖을 먹이게 하다가 3년이 되면 내보낸다.’ 『내훈』
기록에서 나왔듯이 초기에는 사대부의 아내나 사대부의 첩을 유모로 고용하였으나 조선은 남녀가 유별한 유교사회였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유모는 산모 중에서 고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모는 산모가 아이를 낳기 얼마 전에 대개 뽑혔으며 대비나 대왕대비가 심사위원이 되어 유모를 선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모는 대개 천민 중에서 선발되었고 각 기관의 공노비 가운데 젖먹이 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대상이 되었으며 왕실의 아이에게 젖을 주어야 하는 사람인만큼 몸이 튼실하게 생기고, 병이 없어야 하고 말이 없어야 하며 했습니다. 더하여 젖이 진한 흰색이어야 하며, 술은 먹지 말아야 하고, 짜거나 신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등이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정신이 맑고 성품이 온화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러한 유모는 천민 출신이지만 왕실에서는 왕자에게 젖을 먹어야 하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유모가 먹는 것은 곧 왕자가 먹을 것이라고 하고 특별히 식단을 챙겼습니다. 사실 이러한 유모의 건강에 왕자의 건강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여 『명종실록』에는 왕자가 다리의 힘이 약해지고 쇠약해진 듯하자 유모의 건강 상태를 따져 의원이 ‘유모가 습증이 있다.’고 하자 교체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모는 젖을 먹일 수 있는 산모 중에 선발하였으니 그에게도 아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유모나 보모상궁은 궁 박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궁궐에 머무르며 왕손을 보살펴야 했기에 유모는 자신의 아이를 떼어놓고 궁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아이와 함께 궁궐 안에서 키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왕손을 돌봐야 하는 만큼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의 자식을 밖에 두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러다 보니 왕손을 돌보면서도 자신의 자식은 심청이처럼 젖동냥을 해야 했고 급기야 젖을 제 때 먹지 못해 유모의 자식이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모는 왕자가 서너 살이 되면 궁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왕자와 유모의 관계가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왕자는 가장 어릴 때부터 유모와 같이 했으므로 친밀한 사람이었고 어찌 보면 친엄마보다 더한 관계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밀착관계로 인해 대개 유모가 천민 출신이라 하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왕자를 기른 몸이니 귀하신 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문서에 봉보부인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봉보부인이라는 작호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입니다.
‘임금이 유모의 공을 중하게 여겨 옛 제도를 자세히 살펴 법을 세우게 하였더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예전 제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제왕이 유모에게 벼슬을 주는 것이 한나라에서 시작하여 진나라를 거쳐 당나라까지 모두 그러하였으니, 마땅히 예전 제도에 따라 이제부터 유모의 벼슬을 아름다운 이름을 써서 봉보부인이라 칭하고 품계는 종 2품에 비슷하게 하소서,’ 『세종실록』
세종 때에는 봉보부인이 종 2품에 이르게 하였고 이후에는 예우를 높여 종 1품으로 높였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장관격인 육조판서보다 높으며 영의정 다음 가는 벼슬입니다. 봉보부인이 되면 가마를 타고 종을 거느리고 다니며, 궁중 행사에서도 정경부인이나, 공주, 옹주들과 같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봉보부인은 본래 천민출신이지만 왕자에게 젖을 먹인 까닭에 그 대우가 수직으로 상승하였고 그의 남편 역시 천민이라 하더라도 면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봉보부인에 대해 왕들도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종이 34살이었을 때 봉보부인 백씨가 죽었습니다. 봉보부인 백씨가 죽기 전에 성종은 사람을 하루에도 서 너번을 보내어 안부를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백씨의 ᅌᅨ장(禮葬)을 종1품의 종친과 재상의 관례로 행하라고 명하고, 『경국대전』에도 이 항목을 보완해 넣었습니다. 백씨의 장례식에는 그녀로 인해 벼슬과 부귀를 얻은 자들이 보답이라도 하듯 문전을 가득 메웠다고 하는데요. 봉보부인이 가졌던 힘을 생각보다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백씨는 어떤 사람일까. 백씨는 원래 경혜공주의 여비로 이름은 어리니(於里尼), 남편 강선(姜善)도 같은 집 가노였습니다.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차남인 성종은 2달 만에 아버지를 잃게 되고, 젖먹이에게 몰두할 수 없었던 어머니 대신 유모의 품에서 성장한 탓에 성종이 유모가 가진 애착은 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봉보부인이 되면 천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봉보부인 백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종의 즉위와 함께 그녀는 면천되어 양인이 되는데, 3촌 이내의 가족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봉보부인이 된 백씨는 왕실 어른의 자격으로 대비들과 함께 왕비 간택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남편 강선은 벼슬이 당상(堂上)에 이르고, 아들 강석경은 왕을 밀착 호위하는 정3품 겸사복(兼司僕)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이들 가족에게 내리는 쌀과 콩이 수십 석이었으며 말과 노비는 물론 춘궁 조성에 쓰일 재목 일부를 백씨 집에 하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에 따라 그의 권세도 높아서 그에게 빌붙어 벼슬을 구하는 자들도 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봉보부인도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었고 부인 백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덤으로 들어간 지 15년, 연산군은 그녀의 주검을 부관참시하고, 생존해 있던 남편 강선을 능지처사에 처했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 윤씨가 폐위당할 때 곁에서 부왕을 부추긴 죄였으니 봉보부인의 위치는 왕에게 정치적으로 발언까지 건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러한 봉보부인은 희대의 폭군에게도 끔찍하게 존경받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연산군은 최씨의 친척 27명을 양민으로 격상시켰는데 이에 승정원 승지들이 “선대왕(성종) 때도 2명에 불과했으니 과하다”고 고했지만 연산군은 “유모 덕분에 어찌 내가 임금에 됐겠냐”고 말하였고 훗날 최씨가 죽자 연산군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성종 때의 봉보부인 백씨 수준으로 장례를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봉보부인은 조선사회에서 남편의 지위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역할에 의해 봉작을 받은 궁궐밖의 유일한 조선 여성으로 그 지위는 궁녀나 의녀보다 높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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