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장애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023. 4. 29. 15:0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장애인이란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현대에도 이러한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비장애인과 같이 생활하고 싶어도 사회적인 시선과 제반시설이 그들의 의지를 따라가지 못해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는 팍팍하기만 합니다. 그러면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우리가 장애인이라 부르는 단어는 1980년대 초반 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 쓰이기 시작한 것이고 근대 이후에 불구자란 용어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공식적인 기록에는 ‘독질(篤疾)’, ‘폐질(廢疾)’, ‘잔질(殘疾)’ 이라 칭했으며 민간에서는 ‘병신’이라 했으니 오늘날처럼 조롱이나 비하, 욕설의 의미가 아니라 장애를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으로 인식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애인을 깔보지 않았고 하는데요. 평생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아니라 언젠가 나을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한 것으로 『심청전』에서 심청이의 아버지 심 봉사가 눈을 뜬 것도 기적이라기보다는 나았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지체장애인, 척추장애인, 왜소증장애인, 정신장애인, 기형아, 백색증, 구순구개열, 양성인, 성기능 장애인들이 전통시대 장애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장애인에 대한 처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열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애인에게도 직업을 갖고 자립할 수 있도록 권했으며 조선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어떤 장애인이라도 배우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산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듣지 못하는 사람과 생식기가 불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며 “다리를 저는 사람은 그물을 떠서 살아갈 수 있지만 오직 중환자와 불구자는 구휼해줘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한편 북학파의 선구자라 불리는 홍대용은 자신의 책 『담헌서』를 통해 장애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소경은 점치는 데로, 궁형 당한 자는 문 지키는 데로 돌리며, 아인(啞人), 농인(聾人), 벽인(璧人)까지 모두 일자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
 조선조정은 장애인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방치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애인들의 대한 정책으로 가족부양이 원칙이었습니다. 만약 가족이 장애인을 부양할 수 없을 때에는 친척과 이웃 등 마을공동체에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에게는 조세와 부역 및 잡역을 면제하고, 죄를 범하면 형벌을 가하지 않고 면포로 대신 받았으며, 연좌제에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정, 즉 부양자(활동보조인)을 제공하고, 때때로 노인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하사하는가 한편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설치해 위기에 처한 장애인을 구제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애인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도 있었습니다. 점복가와 독경사 그리고 악공 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점복가는 점을 쳐주고 대가를 받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실명해 시각장애인이 되면 주로 점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관상감 소속의 ‘명과학’이라는 관직을 두어 그들은 항상 왕의 곁에 머물며 정치의 길흉을 판단하거나 왕실에 간택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독경사는 도교나 불교 경전을 읽어 병을 치료하거나 기우제를 지내는 것으로, 주로 시각장애인이 했으며 악공은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내연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길거리에서 연주하며 구걸했습니다. 민간에서는 병에 걸리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 이들을 불러 경문을 외우게 하고 대금을 지불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악공을 위한 장악원 소속의 ‘관현맹인’ 제도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조선시대 장애인에 대한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기본적으로 생각하면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윤이후(尹爾厚, 1636~1699)는 자신의 일기에서 “나라가 생긴 이래 장애인을 장원으로 뽑았던 적이 없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라며 비판하였는데요. 반대로 생각하면 장애인을 장원으로 뽑지 않았을 뿐, 이들을 시험에서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장애인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정치가 허조는 구루병을 앓아 등이 굽었지만, 이조·예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오른 명재상이었습니다. 영조 때 우참찬 이덕수는 청각장애인이었고, 조선 후기 명재상 채제공은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숙종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윤지완도 한쪽 다리를 잃은 장애를 가졌지만 활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편 17세기를 살았던 조성기도 20살 때 말에서 떨어져 척추장애인이 되었지만 대학자가 되어 시문집 『졸수재집』과 소설 『창선감의록』을 남겼습니다. 이 외에도 뇌전증으로 고생했던 권균(權鈞, 1464~1526), 왜소증에 히키코모리였던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지체 장애인(앉은뱅이) 심희수(沈喜壽, 1548~1622), 척추 장애로 고생한 김재로(金在魯, 1682~1759) 등은 고위 공무원으로서 공무를 수행했으며 언어장애가 있던 양성지(梁誠之, 1415~1482), 다리를 저는 지체 장애인 황대중(黃大中, 1551~1597), 시각장애인이었던 이람(李覽, ?~?)과 원욱(元彧, ?~?), 네 손가락이 붙어 있던 지체 장애인 권절(權節, 1422~1494) 등은 정승 이하의 관료로 활약하였습니다. 장애인 시인, 화가, 음악가들도 적지 않았으니 정조 때의 시인 장혼은 절름발이였으나 조정의 인쇄소인 ‘감인소’의 관리가 되어 임금이 내린 책들을 교정했습니다. 그는 문집으로 『비단집』 20권을 남겼습니다. 또 조선 후기 시각장애인 부부였던 김성침과 홍씨는 내외가 시를 잘 지었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 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장애인 화가로는 한쪽 시력을 잃은 최북이 대표적이며 음악가로는 이반·김복산·정범·김운란·백옥 등이 꼽힙니다. 
조선시대 4대 왕이었던 세종도 복지정책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태종은 ‘명통시’라는 시각장애인 단체를 만들어 맹인들에게 쌀과 베 등을 상으로 주며 활동을 도왔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장애인단체라 할만 했습니다. 조선 2대왕 정종도 “폐질환자(장애인) 가운데 직업이 있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를 제외하고 궁핍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는 관아에서 우선적으로 진휼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우리나라 3대 음악가로 불리는 박연은 1431년 세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옛날의 왕은 모두 장님으로 악사를 삼아 현송(絃誦)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눈이 없어도 귀로 소리를 잘 살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디 가련한 사람들을 보살펴 음악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말은 들은 세종은 감동하여 관현맹인에게 일 년에 두 번만 주던 돈을 네 번으로 늘려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세종시기에는 시각장애인 연주자만 18명을 뽑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화기 무렵 ‘불구자’라는 말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불구자란 후구샤’(不具者)라는 근대 일본어에서 온 말로 ‘기능이 결여된 인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장애인은 “무언가 부족하고 비정상적이며 나아가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장애인의 수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전차와 철도, 자동차가 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교통사고’가 빈발했으며 산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부상을 입는 등 각종 ‘산업재해’가 생겨나기 시작나기 시작했습니다. 태형과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은 바랄 수도 없었고 장애인 복지정책은 오히려 조선 시대에 비해 크게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장애인들이 해오던 망건 짜기와 그물 짜기, 안경 수리 같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문명화를 이유로 점복이나 독경이 금지되면서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거리에서 구걸하는 장애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