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조선 비밀무기 비격진천뢰

2023. 5. 3. 08: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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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체형은 박과 같이 둥글고 부리는 네모가 졌으며, 그 부리에는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다. 내부에는 도화선인 약선을 감는 목곡(木谷)이 있고, 또한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이 있으며 내부에는 빙철(馮鐵)이 채워진다. 특히 목곡은 폭파시간을 조절하는 장치로서 그 재료는 단목(檀木)을 사용하며, 그 골을 나사모양으로 파서 폭파를 빠르게 하고자 할 때에는 열 고비로, 더디게 하고자 할 때에는 열다섯 고비로 하되, 중약선(中藥線)을 감아 죽통에 넣어 한 끝은 죽통 아래 중심에 꿰고, 또 한 끝은 죽통 위 개철 밖으로 내되 두 치를 넘지 못하게 하며, 이때에 죽통과 개철 주위에는 홈이 생기지 않도록 종이로 밀봉한 뒤 화약은 허리구멍으로 채워 넣고 격목으로 구멍을 막은 뒤 완구에 실어 발사하되 불꽃을 막으려면 진천뢰 심지에 불을 붙이고 나서 완구 심지에 불을 붙인다.”
위 내용은 이서(李曙)가 지은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와 『융원필비(戎垣必備)』에서 말하는 비격진천뢰에 대한 설명입니다. 비격진천뢰는 인마살상용의 폭탄의 일종으로 선조 때 이장손이 발명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화약 무기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비격진천뢰입니다. 그리고 이 무기는 왜군들이 가장 두려워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비격진천뢰를 성안에 대고 쏘니 객사 마당에 떨어졌다. 적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다투어 모여 들어 구경했다. 조금 있더니 폭탄이 속에서 저절로 터져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나면서 철편이 무수히 흩어지니, 여기에 맞아 즉시 죽은 자가 30여 명이요, 직접 맞지는 않았어도 놀라서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징비록』
"박진이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 안으로 발사해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그 포(砲)가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당시 일본군에 함락되어 있던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에 관한 기록으로 이 전투에서 비격진천뢰가 처음 활용되었습니다. 비격진천뢰는 목표물에 도달한 후 일정시간이 지난 후 폭발하였으며 엄청난 굉음을 내며 내부에 있던 철편이 사방으로 날아가 박혀 인명을 살상했던 무기였습니다. 당시의 폭탄은 돌포탄 아니면 통나무 화살 등 대부분 목표물까지 날아가서 충격을 준 이후에 추가적인 작용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했던 지라 적은 진지로 날아온 이 물건을 단순한 쇠공쯤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비격진천뢰의 재질은 무쇠이고, 내부는 비었습니다. 안쪽에는 화약과 쇳조각, 발화 장치인 죽통을 넣었습니다. 죽통 속에는 나선형 홈이 있는 목곡이 들었고, 목곡에는 폭발 시간을 조절하는 도화선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비격진천뢰를 빨리 폭발하게 하려면 10번을 감고, 더디게 터지도록 하려면 15번을 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곡이 원시적 형태의 기폭 장치인 신관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한편 비격진천뢰에는 위쪽과 옆쪽에 각각 구멍이 있습니다. 죽통을 폭탄 안에 넣고 위쪽 구멍을 막은 뒤 옆쪽 구멍으로 화약을 주입했습니다. 이어 죽통에서 나온 심지에 불은 붙이면 일정 시간이 흐른 뒤 폭발했습니다. 비격진천뢰는 대개 완구에 넣어 발사했습니다. 완구는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 나뉘며, 비격진천뢰가 없을 때는 돌을 둥글게 다듬어 쏘기도 했습니다. 한편 중국에는 비격진천뢰와 유사한 '진천뢰'라는 폭탄이 있습니다. 도자기나 금속 재질 용기에 화약을 넣는다는 점은 비격진천뢰와 같지만, 기능과 사용법은 차이가 있습니다. 진천뢰 내부에는 죽통이 없고, 완구로 발사하지 않아 직접 던져 터뜨려야 하는데 그에 비해 비격진천뢰는 폭발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완구로 날려 보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격진천뢰를 컴퓨터 단층촬영(CT) 장비로 찍으면 겉면에 공기구멍인 기공이 매우 많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학계에서는 이 기공을 비격진천뢰 폭발력의 비밀로 보고 있는데요.  창녕 화왕산성에서 나온 비격진천뢰를 보존처리한 국립중앙박물관은 2017년 개최한 '쇠·철·강' 특별전 도록에서 "기공은 충격에 약한 주물의 강도를 떨어지게 만들어 폭탄이 더 쉽게 터지도록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장손이 이것을 발명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던 화포인 완구 중 하나인 보물 제858호 중완구의 표면에는 “萬曆十八年九月日營鐵成震天雷焉里重八十五斤尙州浦上匠李勿金(1590년 9월 상주포의 장인인 이물금이 제작하였으며, 진천뢰를 발사한다.)” 라고 적혀 있어 적어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는 비격진천뢰가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중에 육전∙해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전투에서 사용되어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군이 성을 지키거나 산성에 웅거한 일본군을 포위한 후 비격진천뢰를 적진영으로 날려 보내 천둥과 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수많은 파편을 통해서 적을 놀라게 하고 인마를 살상함으로써 결국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1592년 10월의 진주성 전투에서도 사용되었고, 이듬해 2월에 벌어진 행주산성전투에서도 권율 장군이 여러 가지 화기와 함께 사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였던 것입니다. 또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비격진천뢰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유성룡도“비격진천뢰의 위력이 수천 명의 군대보다 낫다”고 평가한바 있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벌인 김해가 쓴 『향병일기』에도“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진천뢰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일본 측의 기록인 『정한위략』에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 둘러서 구경하고 있는데, 이것이 갑자기 폭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 같이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비격진천뢰가 일본군을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시킬 수 있었던 신병기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일본의 병기전문가 아리마 세이호도 『조선역수군사』에서“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그것은 화공술로서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며 비격진천뢰의 기술적 수준을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병기고』라는 책에도 ‘임진전쟁 때 조선은 대대적으로 대포(완구)를 사용하여 폭탄(비격진천뢰)을 아군(일본군)에게 퍼부었는데, 아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당시 아군은 대포가 전해진 후 시일이 짧아서 조선을 따라가지 못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비격진천뢰의 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조선은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고려말 최무선 장군의 노력으로 화약제조법을 알아낸 후 진포 해전에서 이러한 화약을 이용하여 왜군을 격파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 급속도로 발전하던 화약무기는 조선 초기에 잠시 주춤거렸으나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상대하게 됨으로써 다시 화약을 이용한 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은 무기 기술자들에게 지금까지의 화약 무기를 정리하는 동시에 무기를 개량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권총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세총통이 발명되어 여진족 토벌에 활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448년에는 화포 및 화약 사용법에 관한 책 『총통등록』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종 때에는 조선의 화약기술이 중국을 능가할 정도였고 일본에서 신기하게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이 조선을 부러워하며 만든 화약무기가 바로조총이었습니다. 1543년 포르투갈의 화승총을 연구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조총의 위력에 조선의 육군을 힘을 쓰지 못했으나 해전에서는 화포가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면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화약무기개발에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하여 1593년에는 조총 개발에 성공했고 승자총통 등 기존 무기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 작업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의 가장 독창적인 무기인 비격진천뢰도 개발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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