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최고국립교육기관 성균관

2023. 5. 14. 21: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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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명륜당

조선시대의 최고국립교육기관은 성균관이었습니다. 그런 성균관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일까요.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明人倫 成人才·명인륜 성인재).’ 정도전, 『조선경국전』 上 예전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이지만 이곳이 생겨난 것은 고려시대의 일입니다. 때는 고려 충선왕 때 따라서 성균관은 처음에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 아닌 개경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도 고려 성균관이 남아 있으며 옛 모습 그대로 되살려 고려시대 역사유물을 모아놓고 고려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학문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의 대학교처럼 성균관은 기숙사도 있었고 시험도 있었으며 컨닝을 했다고 합니다. 
이 곳의 건물은 20채에 가까우며 대표적인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습니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폐를 모신 곳입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의 동무와 서무가 있는 영역이 문묘, 즉 제사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해마다 공자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륜당은 오늘날로 치면 ‘대강의실’쯤 되는 곳으로 현판은 1606년 선조 때 파견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습니다. 그리고 실내에 걸린 또 다른 ‘明倫堂’ 현판은 성리학 창시자 주희(朱熹) 글씨를 모아 만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도서관인 존경각, 학생식당인 진사식당, 과거를 치르던 비천당 등이 있습니다. 

문묘대성전


그리고 정문 앞에서는 하마비(下馬碑)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말을 내리는 곳으로 자가용처럼 말을 타고 다니는 유생들도 이곳부터 걸어야 했습니다. 고관대작의 자녀라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마비 옆에는 탕평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린 유생들에게도 당대에 퍼진 당쟁의 폐해를 근절하기 위해 영조가 세운 비석입니다. 그만큼 당대에는 그러한 폐해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륜당에서는 강의와 더불어 시험도 치렀습니다. 매일, 열흘, 그리고 달마다 해마다 치러졌는데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정행위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성균관의 평균정원은 200명이었으며 전원 기숙사 생활이 원칙이었습니다.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의 방은 각 28개, 도합 56개의 방이 있으니 한 방에 묵는 인원은 평균 4명 정도이지만 모든 유생들이 방을 공평히 나눠 쓴 것은 아닙니다.  학생회장인 ‘장의’는 독방을 썼고, 초시를 통과한 ‘상재생’들은 두서너 명이 한 방을, 일종의 보결생(결원을 채우는 학생)이던 ‘하재생’들은 열 명까지도 한 방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곳은 진사식당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식사와 동시에 출석 체크도 이루어졌습니다. 아침, 저녁을 이곳에서 해결했으며 아침과 저녁을 이곳에서 먹으면 1점으로 쳤으며 그렇게 300점을 모으면 과거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다니고 싶은 젊은이의 마음처럼 일부 학생들은 대리출석을 하였고 부모님 병환을 핑계로 밖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성균관을 책임지는 기관장은 대사성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인 셈입니다. 품계는 정 3품으로 여섯 판서보다는 낮습니다. 하지만 성리학의 교육 수장으로 명예로운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 내내 대사성을 지낸 사람은 자그마치 2101명이었습니다. 평균 재임기간은 석 달인 셈입니다. 세종 때 최고 27.9개월이었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갈수록 줄어들어서 ‘학문을 사랑한 군주’ 정조 때는 1.2개월로 급감했습니다. 그리고 고종 때는 1.3개월이었습니다. 그럼 이런 대사성은 어떻게 뽑았을까. 임기는 따로 없었으며 대사성을 임명하는 기준은 대체로 ‘경학에 정통하고’ ‘어질고 덕이 있으며’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자’가 선발되었으니 학문과 인격과 연령이 고려되었습니다. 하지만 천거를 받고도 학문이 부족하고 덕망이 없다는 탈락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인들이 동서재(東西齋) 근처에서 항시 소를 도살하고 있었는데 이달 12일에 말가죽과 소뼈 등을 찾아내게 되었다고 했다. 학궁(學宮·성균관)이 도살장이 됐으니 지극히 해괴하고 놀라운 일이다.’ 『중종실록』, 1542년 1월 19일,
중종은 반정 당일에도 자신이 왕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하는데요. 중종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실질적인 권한은 사림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연산군 때 도의를 외치다가 각종 사화로 절멸되고 초야에 묻힌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림 눈에 관학인 성균관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성균관은 경서 암기학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성종 때 성균관에 등교하는 학생이 없고 과거 시험장에만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랐습니다. 연산군 때에는 이 성균관이 기생파티장이 되었고 중종 때는 위에 나와 있는 기록처럼 텅 빈 교정에서 소를 잡는 도축장으로 변했습니다. 그리던 1543년에는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 백운동 서원을 세웠습니다. 남송 때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뜬 최초의 서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선비를 양성하는 주체가 성균관에서 지역 사림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원에서 유교 교육과 선현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정부는 주요 서원이 설립되면 왕이 이름을 내리는 ‘사액(賜額)’을 통해 권위를 더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성균관 대사성은 명예직 혹은 국왕의 하사품 정도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럼 당시 대사성을 지낸 사람들의 경험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을까. 성균관의 대사성이던 퇴계 이황이 썼던 글을 모아둔 퇴계집에는 ‘사학의 사생들을 가르치는 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글이 있는데 성균관 유생들이 스승에게 인사하기는커녕 서재에 드러누워 흘겨보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유는 ‘제대로 된 학생 예복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라는 것인데 여기에 더 나아가 선생이 훈계 좀 할라고 하면 유생들은 “선생이 우릴 괴롭힌다! 우릴 쫓아내고 학교 돈을 빼돌리려고 한다! 못 참겠다!” 이러면서 이불 싸들고 단체로 학교를 떠나버리겠다는 위협까지 했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도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며 비슷한 봉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다산시문집에는 더운 여름 날 학생들 마음이 붕 떠 책을 보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글을 썼으며 학생들은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고, 스승을 험담하는 글을 써 벽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스승이 정약용인데 학생들은 말썽을 피운 것입니다. 
그럼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학생회라는 것이 있었을까. 당시 학생들은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했으며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회에는 장의(掌議)·색장(色掌)·조사(曹司)·당장(堂長) 등의 임원이 있었습니다. 회장 격인 장의는 동재·서재에서 1인씩 선출해 회의와 제반 업무를 주재시켰습니다. 이와 더불어 6인의 간부도 있었는데, 특정 거실을 사용하며 자치에 관한 업무, 기숙사 운영을 나눠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모임이 필요할 때는 재회를 소집시켰습니다. 위에서 유생들의 버릇없는 면을 언급했는데 한편으로는 국가의 그릇된 정책에 대해 의사표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상소를 올리고 그럼에도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식사를 거부하거나 학생들이 미리 짜고 다 같이 공부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를 권당(捲堂)이라고 했습니다. 공부방에 앉아 있기는 하되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던가 책도 읽지 않고 스승의 말을 못들은 체 하며 시위를 하기도 하였고 ‘호곡(號哭)권당’이라 하여 학생들이 단체로 “아이고” 곡을 하며 대궐까지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관(空館)’이라 하여 단체로 휴학하여 성균관을 텅 비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종 때에도 이러한 공관이 있었으니 유교국가에서 문소전(文昭殿, 태조의 비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사당) 서북 빈 땅에 불당을 건립하려는 일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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