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 최부의 표해록
2023. 5. 19. 20:2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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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한 기행문으로 많이들 떠오르는 작품이 바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그에 못지않은 중국기행문, 어쩌면 그 누구의 기행문보다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최부의 『표해록』입니다. 최부는 표류하여 중국 절강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했고 내륙지방을 거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5세에 성종의 명에 의해 이 표류기를 완성하여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작된 지 80여년 뒤인 1569년에야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여 간행되었고 1578년에 다시 재간행되었습니다.
『표해록』을 지은 금남 최부는 본래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해남 정씨 정귀감의 사위가 되어 해남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헌부 감찰·홍문관 부수찬 등 여러 관직을 지낸 그는 『표해록』외에도 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 편찬에도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금남 최부는 1487년 9월, 도주 노비나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일을 하는 추쇄경차관이 되어 제주도로 파견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추자도 인근 해역에서 풍랑을 맞닥뜨렸고 폭풍우와 기갈, 선원들과의 갈등, 해적의 위협 등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 끝에 표류 14일 만인 1월 16일 절강성 임해현에 표착했습니다. 당시 그는 처음에 왜구로 오인받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사형을 당할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중국관리의 도움으로 조선관원 신분이 확인되었으며 송환절차에 따라 북경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최부 일행은 항주와 소주를 거쳐 양자강을 건넜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사대부가 가보고 싶어 하는 중국 강남과 대운하를 처음 경험하는 행운을 갖기도 했습니다. 양주-회안-서주를 지나 산동성과 하북성을 거쳐 북경에 도착해 명나라 황제 홍치제(1470~1505년)를 알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최부는 선비로서 품격을 잃지 않았고, 부친상을 이유로 상복을 벗지도 않았고 그런 모습에 감탄한 홍치제가 상을 하사하고, 한양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그는 임금의 명을 받아 『표해록』을 저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표해록』을 통해 소주에서 중국인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몇 품이요?” 나는 대답했다.
“5품관이요” /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시오?”
“우리 나라 선비들은 모두 경학을 궁리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소. 그러나 풍월을 읊조리는 것을 천시하기 때문에 나 역시 시사(詩詞)는 배우지 않았소.”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는데 지금 그 후예는 있소? 또 사당이나 무덤이 있어 제사를 받들고 있소?”
“기자의 후손인 기준은 위만에게 쫓겨나 마한으로 도망하여 도읍했으나, 후에 백제에게 멸망당했으며, 지금은 후사가 없소. 기자묘는 평양에 있는데 국가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짐승과 예물로써 제사를 지내고 있소.”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모신(謀臣)과 맹장(猛將)이 병사를 지휘하는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졸된 자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 지금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한 나라로 통일되어, 인물은 많고 국토는 광대해져 부국강병하오. 충직하고 슬기로운 인재는 수레에 싣거나 말(斗)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소.”‘ 『표해록』
그리고 강남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소주에서 보고 느낀 점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소주에는 선비들이 못과 숲에 모여든 고기와 짐승처럼 많습니다. 바다와 뭍의 진귀한 보물들과 비단, 금·은, 구슬들과 온갖 장인과 재주꾼들로 부유하고 큰 상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듭니다. 강남에서도 소주와 항주를 제일가는 고을로 여겼습니다. 저자 가게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그득 퍼져 있으며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누대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표해록』
그리고 1488년 4월 20일 그는 북경 자금성에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상복입기를 고집했는데요. 그러자 중국 관리가 여기는 아버지 빈소가 있는 곳이 아니고 황제를 알현하는 곳이니 옷을 갈아입어달라고 하자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제를 알현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황제가 있는 성의 바깥문 빗장이 열렸고 늘 조회에 참석하는 관리들이 물고기가 줄줄이 묶여 있듯이 가지런히 들어갔습니다. 신은 일의 형세가 긴박하므로 갈복으로 갈아입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층 문과 2층으로 된 두 큰 문을 지나서 들어가자 또 2층 큰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은 오문이었고 군사들의 위엄이 엄정했으며 등불의 빛이 눈부셨습니다. 저는 뜰의 가운데 앉혀졌습니다. 조금 있다가 오문의 왼쪽에서 북을 울렸습니다. 북소리가 끝나자 오문의 오른쪽에서 종을 울렸고 종소리가 끝나자 세 개의 무지개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문마다 두 마리의 큰 코끼리가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모양새가 매우 기이하고 컸습니다. 동틀 무렵 조정의 관리들이 차례로 반열을 지어 섰습니다. 관리는 저를 이끌고서 조정 관리의 반열에다 세웠고 다른 무리는 국자감 생원들의 뒤에 세웠습니다. 다섯 번을 절하고 세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린 뒤에 단문을 통해 나왔고 다시 승천문으로 나왔습니다. 또 동쪽으로 가서 장안문의 왼쪽 문으로 나와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장안 거리를 지나 숙소인 옥화문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표해록』
이 외에도 『표해록』은 중국 명나라의 실정을 세밀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산천, 교량, 민속, 민요, 제도, 의식주를 두루 담은 이 책의 정보에 대해 중국학자들도 감탄하였습니다. 그리고 운하의 운용기술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며 중국의 강남사람들과 강북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대해서도 비교하며 기록해 놓았고 중국과 조선와 과거제도 비교, 환관제도, 관리들의 의관, 접대용 차와 술 등이 적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남북 지방의 서로 다른 구어체 어휘들은 중국 언어학자들에게 흥미 대상이었습니다. 외국인의 기행문에서 자국의 언어적 소재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해록』의 가치는 오히려 외국에서 인정받았습니다. 일본 에도시대 유학자 기요타 기미카네가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왔으며 최초의 학술적인 번역은 존 메스칼이란 미국학자가 하였습니다. 1970년대 이후 국역(國譯) 작업이 이루어지면서부터 『표해록』의 존재가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1995년 중국 학계는 ‘외국인이 기록한 세계 3대 중국기행문’으로 최부 『표해록』을 꼽았습니다. 북경대학교 거전자(葛振家) 교수는 최고의 중국기행문이라고 평하면서, 『표해록』의 특별한 가치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먼저 운명과 맞서 싸운 분투정신, 둘째, 국가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애국정신, 셋째, 환관이 발호하는 명대의 정치를 질타하는 비판정신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표해록』을 지은 금남 최부가 사망하자 『연산군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합니다.
‘최부는 공렴정직하였고 경전과 사서를 폭넓게 섭렵하고 있었고 문사(文詞)에 넉넉하였다. 간관이 되어서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죽임을 당하자 조정이나 재야의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
그는 중국의 수차 원리까지 기록해 놓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성종과 연산군 때에 중국식 수차를 소개하고 직접 감독하여 만들었으며, 가뭄 때 충청도에 가서 수차 제작기술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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