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예능꾼 광대

2023. 6. 10. 19: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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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년(연산군 11년) 12월 29일 궁궐에서 나례회가 열렸습니다. 나례회란 음력 12월 동지(冬至)에 열리는 귀신 쫓는 행사로 이 의식에는 광대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광대들은 귀신들이 무서워한다는 가면을 쓰고 나와 악기를 연주하며 광대놀음을 하였습니다. 광대는 나라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여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광대가 사회 문제를 담은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며 왕에게 보여 주었는데 여기에는 민심도 담겨 있어 왕은 이를 통해 백성들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궁에서 열리는 주요 축제인 나례회 때 연산군 앞에서 공연한 사람은 '공길'이라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연극에서 늙은 선비 역할을 하며 연산군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창고에 가득한들 내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연산군은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자신을 임금답지 못하다고 한 것에 분개한 것입니다. 산군은 길길이 뛰며 공길에게 매질을 했고 멀리 귀양을 보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연산군의 명령으로 나례회는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연산군이 쫓겨난 뒤에야 다시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연희(말과 동작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재주를 부림)를 팔아 먹고사는 천민을 '광대'라고 불렀습니다. 이전 고려 시대에는 광대가 '가면을 쓰고 노는 사람'을 뜻했으며 조선 시대에 와서는 광대가 가면극·인형극·줄타기·땅재주·판소리·춤 등의 연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광대는 나례회 말고도 국왕 행차나 장례 행렬, 과거 급제자의 축하 행사 등에서 공연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당패·광대패·남사당패 등 '유랑 광대'가 많았습니다.  유랑 광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광대로 사당패는 남자인 '거사'와 여자인 '사당'이 4~6명 모인 유랑 집단이며  광대패는 재인청 출신의 무부(巫夫), 즉 무당의 남편들이 광대로 나서 판소리·곡예·검무·가면춤·꼭두각시놀이·가곡 등을 공연하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남사당패는 40~50명의 남자로만 구성돼 전국을 순회하는 유랑 집단을 말합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의하면, 광대는 봄·여름이면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겨울이면 농촌으로 가서 공연했다고 합니다. 

조선역사에 있어 광대는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재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국가에 소속되어 관리받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관리하는 기관은 재인청(才人廳)으로, 조선 말까지 지방에서 활동하였던 직업적인 민간 예능인의 연예활동을 행정적으로 관장하는 것이 주 업무였습니다. 재인청의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어지고 있는데 신청(神廳), 악사청(樂師廳), 광대청(廣大廳), 화랑청(花郞廳), 장악청(掌樂廳), 풍류방(風流房), 공인청(工人廳) 등이 그것이며, 경기, 충청, 전라 등 전국에 있었습니다. 또한 각 지방의 재인청은 조선조에 광대(혹은 재인, 창우, 화랑)들의 공연 예술을 하나의 조직적인 신분 집단으로 공식적으로 담당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공연예술을 담당하는 것은 광대와 기생 등이 있었습니다. 기생은 관청에 속해 있어 그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으나 광대 집단은 유사시에만 관청에 동원되고 평소에는 민간에서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 공연예술의 대부분은 광대에 의해 씌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지난 2003년에는 이 광대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습니다. 고려 중기부터 조선말까지 세습적 ‘광대집단’이 존재했으며, 판소리도 이들 집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연구결과입니다. 이것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동안 정설로 여겨온 판소리의 서사무가(敍事巫歌)기원설을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장한 학자는 “신분제가 유지됐던 조선시대 말까지 관청의 행사에 공식적으로 동원됐던 ‘광대집단’의 존재와 역사가 실증적으로 입증됐으며, 그들의 가창문화 중 ‘재담소리’가 바로 판소리의 기원”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산대희’와 ‘나례희’, 과거 급제자의 축하행사 등 중앙과 지방의 각종 관급행사를 위해 일정규모의 광대집단이 지속적으로 필요했다”며 “이미 고려중기부터 과거응시나 토지소유를 금지해 오직 민속 예능만을 할 수있게 한 특수 신분집단을 만들고 세습화, 조직화했다”고 말했습니다. 즉 ‘광대’는 흔히 민속연희를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닌 신분적 특수명칭이라는 것입니다, 광대집단은 경기 이남의 경우 세습무(世襲巫) 집안의 남자들로 유지된 화랑이 집단이 대표적이며 강신무(降神巫)위주였던 경기 이북의 경우는 달랐다고 합니다. ‘재인촌’은 고려시대부터 기생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광대집단으로 지금도 경기북부 곳곳엔 광대촌이나 재인촌이란 이름이 남아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836년만 해도 경기도에만 광대가 4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해 신분해방이 될 때까지 그 공식 신분을 유지했지만 이후에도 토지 등 재산이 없어 민속예능만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광대들은 중국의 사신들이 왔을 때에 초청되어 공연을 펼쳤습니다. 지방관아에서 생계활동을 하다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에 도성에 올라와 공연을 펼친 것입니다. 성현의 시, 「관괴뢰잡희」에느 중국 사신 영접 때 광대들이 공연한 놀라운 수준의 연희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번쩍번쩍 금빛 허리띠 붉은 옷에 빛나는데/물구나무 땅재주 나는 듯한 몸놀림
줄타기, 구슬 놀이 기술도 많은데/나무 인형에 실 꿰어 신기한 동작 자유롭구나’
하지만 광대들은 신량역천, 즉 법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천인처럼 다루어졌습니다. 과거를 보지 못했고 토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세종대에는 이들에 대해 ‘백정’으로 승격시켜주었지만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재백정’이라 하며 자신들과 구분지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름난 광대 중에 달문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18세기 조선, 도성 청계천 수표교 밑 거지 무리의 왕초였던 달문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고 콧구멍이 하늘로 향한 데다 귓불이 어깨에 닿을 만큼 늘어져 ‘가장 못생긴 거지’로 통했습니다. 글자도 모르고 셈도 약해 멍청하기로도 유명했지만 반면에 달문은 재담과 철괴무(탈춤의 하나)가 출중해 조선 최고의 광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의 무대를 보려면 고관대작들도 매달려야 했습니다.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서 그를 기억하는 양반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의 이름을 딴 달문가라는 노래가 지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재주를 넘고 춤을 추는 와중에서도 쉴 새 없이 재담을 늘어놓거나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능력으로 달문은 당대 사람들에게 최고 인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양에서 제법 논다고 하는 패거리들은 달문을 모시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놀이판에 끼고 안끼고는 흥행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광대인 달문은 집조차 없어서 떠돌이 생활했으며 그의 재주에 감탄한 양반들마저 그의 근본없음을 손가락질했습니다. 집도 없었기 때문에 결혼도 할 수 없었지만 그전에 못생긴 외모 때문에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한편 약방에서 일을 할 적에는 물건이 없어졌을 때에 의심을 사 물건값을 치르고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약방주인의 친구가 자신이 말도 없이 약을 가져갔다고 말해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광대들에 대한 조선 시대 사람들의 멸시는 상당했습니다. 1781년 광대 조위기가 구타로 인해 사망하는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가해자 주갑득은 광대 주제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두들겨 패서 죽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천대를 받았던 광대, 하지만 그들이 있어 오늘날의 민속예능이 존재할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는 총 22개의 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한 세계 공동 2위의 무형문화유산 보유국가로 먼저 살았던 광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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