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회지배층 양반

2023. 6. 11. 19:5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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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의 지상 과제였던 과거는 오늘날 고시공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처절했었다. 합격해도 영광은 잠시뿐, 관직의 길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림은 과거 급제자가 벌인 삼일 유가의 한 장면.

우리가 양반이라 하면 조선시대에 국한되어 생각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조선시대 지배신분층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관제상의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조선 초기부터는 관제상의 문·무반 뿐 아니라 점차 지배 신분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인식이 생긴 것 같습니다. 국왕이 조회(朝會)를 받을 때, 남향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에 서는 반열(班列)을 동반(東班: 문반), 서쪽에 서는 반열을 서반(西班: 무반)이라 하고, 이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이라 하였습니다. 본래 관제상의 의미로 고려초기부터 사용되었으니 생각보다 양반이란 단어의 사용은 오래된 셈입니다. 고려가 관제상의 양반을 사용했던 것은 이전의 왕조 신라의 골품제를 타파하고 광범한 재지 호족군(在地豪族群)을 국가 관료로 등용하는 집권적 양반관료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반과 무반을 처음으로 구별한 것은 976년(경종 1)에 실시된 전시과(田柴科)서부터였습니다. 이러한 경종 전시과의 문반·무반·잡업의 구분은 전시 지급을 위한 다분히 편의적인 구분이었습니다. 조선사회에 대해 누군가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고려의 양반체제는 지나치게 문반 위주로 치우쳐 있었고 조선에 들어서 문무양반체계가 균형을 잡아갔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문반과 무반 즉, 양반 외에도 남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반관료체제가 정비되면서 남반은 동·서양반에 눌려 점차 7품 이하의 천직(賤職)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조선시대의 지배층은 동·서·남 3반이 아닌 동·서 양반으로 정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양반이라 하면 본래는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반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그 가족,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고 관제상의 문·무반을 뜻하는 본래의 양반 개념은 고려·조선시대의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양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양반이라 하면 대체로 관제상의 문·무반을 지칭하는 경우로 이해되며 고려 말 조선 초기부터는 양반이라 하면 관제상의 문·무반뿐 아니라, 점차 지배 신분층을 지칭하는 경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조선 시대에서는 양반을 사대부(士大夫), 사류(士類), 사족(士族) 등이란 말로 부르기도 했으니 이는 곧 조선의 사회지배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에서도 양반이란 용어가 간혹 쓰입니다. 간혹 ‘우리 집 양반’하면 남편을 일컫는 말이고 길가는 사람 혹은 상대방을 대충 부를 때 ‘여보시오, 젊은 양반’하면 이것은 가늠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해 대충 부르는 말일 것입니다. ‘그때 고생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사는 거야 양반이죠’이라 한다면 이때의 양반은 이전보다 나아진 상태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에서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 양반은 현대에서는 다른 말로 쓰이고 잇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조선사회에 법제화된 지배층이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는 양천제였습니다. 모든 백성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한 국가적 신분제도로 기본적으로 양인은 자유인이며 공민(公民)으로서 기본권을 보장 받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지만, 천인은 비자유인으로서 각종 구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양인이 거느리는 재산으로 취급되면서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 존재였고, 벼슬길을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양인들 사이에서는 의무와 권리에 있어서 차별이 없었습니다. 16~59세의 양인남자는 군역을 가지고 있었고 양인이라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경국대전』에 근거하여 죄를 지어 관직임명이 차단된 사람, 뇌물을 받거나 국고를 횡령한 관리의 아들,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의 자손은 과거를 볼 수 없었습니다. 지배층의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을 중시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같은 양인이라 하더라도 관직에 오른 양반과 일반 상민은 계급이라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조선의 주요 관직을 차지한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을 ‘사족’이라 칭했고 그렇지 않은 백성을 ‘상민’이라 부르며 구분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족 층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연산군 대에 이르러 왕실이 국가재정을 낭비하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적자가 커지고 세금 부과 금액의 적정선을 넘었습니다. 이는 양인 계층의 세금부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하층양인들은 몰락하였고 이들의 경제력을 흡수한 상층 양인들은 지위를 높여가며 그에 걸맞은 대우를 국가에 요구했습니다. 그에 따라 『경국대전』이 반포될 당시 관직에 오른 자와 그 일정 범위 내의 후손을 포함하였는데 1525년 조정은 사족층을 ‘4조(부,조,증조,외조) 가운데 한 쪽이라도 과거 혹은 음서로 문무반 정직 6품 이상에 진출한 관료를 배출한 가문의 후손 및 생원 진사 그리고 그들과 인척관계에 있는 가문으로 규정함으로써 이 규정으로 사족은 양반과 같은 의미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학업에 매진하여 관직을 독점해간 사족층이 양반이 된 것입니다. 이후 사족층은 임진왜란 중에 의병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역도 면제받기에 이릅니다. 1627년에는 조정은 사족으로 군대를 보충하는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하여 국가에 대한 양인의 의무인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1783년 각 지역의 호구조사 결과 양반인구 비율이 급격히 늘어난 반면, 노비 비율은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양반의 증가는 양반 자체의 출생률 증가라기보다 양인이나 노비층이 각종 방법을 동원해 양반계층으로 들어왔기 때문으로 향촌 신분질서가 극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합니다. 양반 인구급증은 지난 임진·병자의 양란 중에 정부가 납속책과 공명첩을 통해 전공을 세우거나 재산을 국고에 헌납한 양인들을 양반으로 승격시켜주고, 노비를 면천시켜 준 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불법적인 방법으로 신분상승을 꾀하기도 했는데 족보위조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자식 없이 단절된 가계의 족보를 구해 자신이나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을 넣었고 족보를 편찬할 때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고 본관과 성씨를 바꾸는 이른바 환부역조가 횡행했습니다. 그리고 전주 이씨의 가짜 족보를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호적대장에 있는 자신의 직역을 관직이 없는 양반을 의미하는 유학(幼學)으로 속여서 기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에 풍자한 소설이 바로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입니다. 어떤 부자가 가난한 양반에게서 ‘양반의 신분’을 삽니다. 상인, 즉 상놈 신분인 그는 그날로 양반이 되었습니다. 원님이 그 두 사람과 세상 사람들을 부른다. ‘계약서’를 쓰게 합니다. 계약서의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양반(신분)을 반납해야 하는 등의 조건을 낭독합니다.
“… 느린 걸음으로 걷는 법이다. 글씨는 깨알처럼 한 줄에 100자씩 써야 한다. 돈을 만지지 말고 날씨가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아야 하며 밥을 먹을 때도 의관을 정중히 해야 한다 …”
“…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으니 이웃집 소가 있으면 자기 논을 먼저 갈게 한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자기 밭의 김을 먼저 매게 하는데 누구든지 말을 듣지 않으면 코로 잿물을 먹인다. 상투를 붙들어 매고 수염을 자르는 형벌을 가하여도 원망할 수 없다 …”
이런 말도 안되는 문장에 가짜 양반은 양반이 되는 것을 포기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 추사 김정희는 충청도 명문가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종가의 양자로 들어가 종손이 됩니다. 열다섯 살, 아내를 맞이하고 24세 때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됩니다. 서른이 되기 전에 문장과 글씨로 조선에 이름을 알렸으며, 34세 때 대과에 합격하고 첫 아들을 얻습니다. 37세 때 규장각 대교가 되고, 41세 때 암행어사가 됩니다. 하지만 55세 때 제주도로 귀양가 위리안치되고, 59세 때 우울한 생을 한탄하며 명작 '세한도'를 그렸으며 이후 추사는 잦은 병치레로 고생하다 71세로 세상을 뜹니다. 조선은 국왕이 1인이었고 지배층인 양반의 나라였으니 조선은 양반의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최고지배계급이었던 양반은 당대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그 뒤에는 그만큼의 책임과 무게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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