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신문 주보
2023. 6. 17. 16:5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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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수많은 기록물을 남겼는데요. 그 중에는 현대의 신문에 해당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바로 「조보」가 그것입니다. 지난 2017년에 발견된 조보는 영천의 한 사찰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577년 음력 11월 6일 자와 15일 자 등 발견된 조보는 모두 5일 치입니다. 이 때 발견된 것은 민간에서 만든 것으로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적 기록 안에서만 존재했던 민간 조보가 현물로 발견된 건 처음이었으며 종이의 지질과 활자의 상태, 크기를 볼 때 16세기 후반 필사가 아닌 목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보았브니다. 또 연속된 발행날짜를 볼 때 매일 발행됐고 조정의 인사발령부터 날씨와 사건·사고 등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는 1577년 인쇄물로 확인된다면 세계 최초의 상업 일간지이자 활자 신문으로 기록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원래 승정원에서 ‘필사(筆寫)조보’가 배포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관리의 임면 등 인사 행정 그리고 국왕의 거동, 경연(經筵) 등의 궁내의 소식이 실렸습니다. 이와 함께 당시 지배 사상이던 유교를 전파하는 내용의 정보도 다뤘고, 유생이나 관리가 올린 상소문과 상소에 대한 왕의 답변도 실렸으며 관리들이 올리는 각종 보고서도 게재되었습니다. 통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알리미역할로 발행된 것인데 폐쇄성이라는 특성과 더불어 주요 독자층인 사대부들이 구독하기에는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필사한 덕분에 그 내용이 반드시 같지 않았으며 지방으로 내려가서 필사가 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기도 하고, 누락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의 저서 조선서지에 의하면 조보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고 고관들에게 배포된 조보일수록 그 내용이 더 완전하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는 중앙판과 지방판의 분리가 아닌 필사로 인한 불완전성에 기이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양에 있는 양반들은 이런 조보를 매일아침 받았으며 지방의 관리나 양반은 5~10일 정도 걸렸습니다. 당시 교통여건 등을 고려하면 조보 발행에 꽤나 신경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조선정부는 이러한 조보 발행을 통해 지방과의 긴밀한 관계를 원했을 것입니다. ‘조보'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 중 1508년 3월14일 중종실록 5권에 처음 나타나지만 1515년 중종이 "조보는 예로부터 있는 것이다"하니 조보는 예부터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무관과 기생출신 수급비(물 긷는 여종) 궐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무관 우하형은 문자를 아는 기생출신 수급비(물 긷는 여종) 궐녀를 만나게 됩니다. 궐녀는 우하형이 병마절도사가 될 상이라 생각해 경제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조보를 통해 우하형의 소식을 수소문하며 평안도 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한 우하형을 찾아가 관아 안살림을 관리합니다. 이후에도 조보를 계속 읽음으로써 조정의 정세를 파악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기반으로 뒷바라지를 한 결과 우하형이 마침내 병마절도사로 승진하게 된다고 합니다. 한문을 읽을 줄 아는 기생 출신 첩이 조보를 활용해 조정에 영향을 끼쳐 남편을 병마절도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이러한 조보에는 관리의 임면, 이동, 승진 등 인사동정 기사가 주를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날씨 기상 천문, 사망, 개명, 농사, 범죄, 문안, 과거, 건강, 자연재해 및 역병, 외국동정 등이 실렸습니다. 이러한 조보에는 군사기밀이나 비밀을 요하는 내용을 담지 못하게 했으며 글씨가 졸필이며 알아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상소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조보는 폐간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중종 대에 이르러 비밀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보의 발행을 금지하는 대신들의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발행하는 언론지로 봉건통치의 보조수단으로 그 역할이 있었고 비밀을 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승정원에서 검열을 거치면 된다고 하여 중종은 계속 조보를 발행할 것을 명합니다.
이러한 조보는 삼국시대의 기별제도에서 그 원류를 찾기도 합니다. 기별은 중앙정부에서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보내는 일체의 통신문으로 기별은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사실이나 소식을 전하여 알게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적은 양을 먹었을 때 간에 기별도 안간다라는 표현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보를 발행하기 위해서 기사를 작성하고 이 일은 승정원에서 실무를 담당한 주서가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밤새 주서가 쓴 것을 승정원의 하급관리들이 밤새 필사하여 여러 개의 조보를 만듭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주서에 대해 취재 제한도 실록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기사가 작성되면 조보소에서 인쇄를 담당하였으며 승정원 하급관리가 쓴 필사본은 아침에 조보서에 게재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여러 관청에서 온 담당관리들이 재빨리 필사하였고 소속관청에 돌아가 전달하였는데 전달책들을 기별서리라고 했으며 기별군사를 통해 전국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선조 때에 이르러 민간에서 제작하는 인쇄조보가 등장했습니다. 1577년(선조 10년) 8월 서울에 사는 일군의 양민 식자층들이 의정부와 사헌부로부터 발행허가를 받은 것입니다. 이들은 승정원에서 매일 나오는 필사조보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목활자본으로 인쇄조보를 발행해 판매했는데요. 기록으로만 전해진 것이 영천 용화사 지봉 스님이 공개한 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朝報)’를 공개함으로써 그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발견된 조보를 보면 발행일은 정축년(丁丑年, 선조 10년)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 등입니다. 이에 대해 “23일, 24일 자가 연속해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일간(日刊)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또 내용을 분석한 결과 인물, 역사 사건, 연도 등이 ‘왕조실록’, ‘선조실록’ 등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말했습니다. 조보의 크기는 가로 40㎝, 세로 29㎝로 소책자 형식이 아닌 타블로이드 판형이며, 한 면의 행수가 좌우 각 11행(도합 22행)이며 한 행에는 21∼22자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순한문으로 된 인쇄조보의 1일치는 2장 가량에 968자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쇄물에 대해 당시 몇 부가 발행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부를 수백 명이 돌려 봤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선조 당시의 인쇄조보는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인이 발행하고 활판인쇄술을 채용하여 발행하였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일간신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우연히 조보를 보건대(···) 매우 놀랄 일이다. 어째서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만들었는가”
하지만 선조는 이 민간에서 발행한 조보를 보고 질책합니다. 조정의 허가를 받고 인쇄조보 발행을 시작했지만 인쇄조보를 보고 “사국(史局)을 사설화(私設化)하고 국가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폐간 조치합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배후를 색출하기 위하여 약 45일 동안 조보 관계자들을 취조한 뒤 30여 명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유배를 보냈다고 하니 셰계 최초의 민간 신문의 이면에는 전제왕조의 언론탄압이 자리한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조선 선조 시기에 나온 조보를 세계 최초의 민간신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1660년 독일에서 발행된 <라이프찌거 짜이퉁 Leipziger Zeitung>을 세계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보고 있으며 뉴스를 전달하는 ‘신문’의 기원은 B.C. 59년의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원로원과 의회에서 무엇을 결정했는지 시민에게 알려 주는 발표문으로 이를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라고 하는데 공공장소에 벽보처럼 붙인 것입니다. 또한 중국의 한대(漢代)에는 중앙의 소식을 지방에 알린 ‘저보(邸報)’가 나왔고 이것이 송대 이후 ‘조보(朝報)’로 발전했으나 이것들을 학계에서 근대신문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1577년에 발견된 조보는 세계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볼 수 있을까.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이것은 선조에 의해 발행이 중지되었습니다. 매일매일 혹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행이 계속되었다면 세계 최초의 신문이 될 수 있지만 일찌감치 폐간된 신문은 기록으로 남겨지고 다시 정부에서 필사로 발행하는 조보 형태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1883년에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를, 1896년에는 「독립신문」이 창간되었으며 「독립신문」의 창간일 4월 7일은 신문의 날로 지정되어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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