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왕비가 되려면

2023. 6. 20. 18:5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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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왕권 시대에서 임금은 백성위에 군림하는 최고 통치권자로 그의 결혼식을 중요한 의례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신붓감 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국왕의 여인이 되면 한 남성의 배필뿐만 아니라 다음 왕의 어머니가 되는 자리이므로 당시 여인들의 최고 출셋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 다른 처녀들은 산이 깊다거나 물이 깊다고 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人心)이 가장 깊다"고 답했습니다. 장차 왕이 될 세자의 비를 간택하는 일은 왕대비와 대왕대비 일이었지만 영조는 자신이 직접 간택을 자청했습니다. 이번엔 영조가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정순왕후는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고 답했습니다. 15세 어린 나이에도 백성을 위하는 갸륵한 마음씨는 영조의 마음을 흔들었고 정순왕후는 왕비로 간택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왕의 여자가 되어야하는 만큼 용모도 고려사항이 되었습니다.
‘세계(가문의 내력)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할 것이다.’ 『세종실록』 
당시 임금은 신붓감을 찾기 위해 중매쟁이를 쓰는 대신 공개 구혼에 나섰습니다. 혼기를 맞은 여성을 대상으로 금혼령을 내리고, 전국에 광고를 내 후보 신청을 받았습니다. 지역마다 왕실 규정에 맞는 여성 정보를 써낸 처녀단자를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혼인할 왕이나 세자의 나이에 따라 달랐지만, 적게는 8세부터 20세에 이르렀는데 따라서 이 나이대의 양반가 미혼 여성들은 왕가의 혼례 때까지 혼인이 금지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610년 세자빈 간택 시에는 당시 열 세 살이던 왕세자의 나이를 고려하여 8~14세의 처녀들이 금혼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순 여섯살의 영조가 재혼할 때에는 16~20세의 처녀들이 금혼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대부이면서 사조(부ㆍ조부ㆍ증조부ㆍ외조부) 중에 현관이 있는 집안의 적령기 미혼여성은 궁궐에 처자단자를 신고해야 했습니다. 이는 해당 여성의 사주 등을 쓴 문서로 일종의 서류심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당 연령대에 해당하는 양반가의 딸이라도 모두 단자를 올릴 수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실과 본관이 같은 전주 이씨 처녀, 전주 이씨가 아닌 이씨 처녀, 국왕의 이성(異姓) 8촌이내의 처녀, 대왕대비의 동성 7촌과 이성 6촌내의 처녀, 왕대비의 동성 5촌 이내의 처녀, 부모가 모두 살아 있지 않거나 한 명만 살아 있는 처녀 등의 단자는 왕실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먼 곳으로 귀양 간 죄인의 자제의 단자도 받지 않았으며 작은 흠결이 있다고 판단되는 가문은 서류심사에서 탈락시켰습니다.

‘그 때 내 집이 극히 빈곤하여 치마저고리를 해 입을 길이 없으니, 치마는 오빠 혼수에 쓸 베로 만들고, 옷 안에 넣을 것이 없어 저고리 안은 낡은 옷을 내어 입으니라. 지금도 당시 우리 집이 청빈한 일이 생각나며, 어머님 애쓰시던 일이 눈앞에 떠오르니라.’ 『한중록』
 이러한 임금의 구혼이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닙니다. 왕이 곧 신붓감을 찾아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 대부분의 양반가는 딸을 시집보내거나 나이를 속여 처녀단자 제출을 피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딸은 궁궐에 평생 갇혀 지내야 하고, 가문은 조정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간택 과정에서 쓸 의복과 가마 등을 마련하는 데에 많은 비용이 들었는데 국왕의 국혼 예산은 무려 6억8000만원이나 소요되었던 만큼 양반가에서 간택 참여에 들여야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일부 권력가문의 딸이 이미 내정돼 있을 가능성도 컸습니다. 인조 16년에는 딸을 숨기려다 발각된 전ㆍ현직 관료들을 잡아다가 추문하기도 했을 정도이며 이렇게 거둬들인 처녀 단자는 많아야 25장 내외였다고 합니다. 또한 인현왕후 가례 때는 3일이 지났음에도 처자단자가 7장밖에 올라오지 않자 숙종은 기강이 해이해졌다면서 단자를 하나도 올리지 않은 지역의 수령이나 한성부의 관련 업무자를 파직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양반가에게 왕의 아들을 사위로 맞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녀단자를 제출한 신부 후보들은 세 차례 간택 과정을 거쳤습니다. 첫 간택 후보는 30명 안팎, 두번째가 5~7명, 세번째가 3명 정도였습니다. 초간택날이 되면 일관이 길시라고 점친 시간에 곱게 치장한 처녀들이 사인교 가마를 타고 궁으로 옵니다. 양반가의 딸이었기 때문에 몸종과 유모 이외에 미용사인 수모까지 따라왔습니다. 간택이 치러질 처녀들에게 초간택 전에 간단한 차와 과자가 놓인 다담상을 받았습니다. 발 너머로 이 모습을 대비와 종친, 외척들이 지켜보았는데 이를 통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처녀들에게 국수장국을 비롯해 신선로, 화채 등을 차린 점심 진지상이 대접되었으며 이를 통해 처녀들의 밥상머리 예절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초간택이 끝나고 나면 왕실에서는 푸짐한 선물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 재간택에 참여할 처녀를 발표하였습니다. 재간택에 앞서 처녀들을 대상으로 천연두를 앓았는지 검사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재간택자리에서는 왕실 어른들의 면접을 보았습니다. 재탁택을 치르고 보름 후, 간택의 마지막 관문인 삼간택에서는 처녀들이 칠보족두리에 초록 당의를 입었으며 노리개와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하였습니다. 이후 최종 한 사람이 선발되면 금혼령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초간택과 재간택에서 탈락한 처녀들에게도 혼인이 허락되었습니다. 이후 마지막으로 선발된 한 사람을 비씨(妃氏)라고 불렀으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례복으로 갈아입은 뒤, 공주나 옹주가 타던 가마인 덩을 타고 별궁으로 들어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를 때까지 궁중예법을 익히고 왕비로서 갖추어야할 수업을 받았습니다.  

조선 후기 역대 국왕과 왕비가 혼인했을 때의 연령을 살펴보면 10세부터 19세까지로 평균 15세 안팎의 처녀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간택에서 떨어진 후보들은 평생 수절하며 살았다거나 후궁으로 들어갔다는 설이 지금까지는 만연했으나, 실제로는 최고 명문가의 집안 자제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탈락자에겐 푸짐한 선물을 주고 귀가시켰습니다. 간택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덕행과 문벌, 가훈이라 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조선 영조 기록에는 “요즘 간택은 용모가 예쁘고 말씨가 우아한 여자를 선호해 불경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율곡 이이나 우암 송시열 등도 당대 임금에게 “왕비를 고를 때 용모와 자태, 옷맵시를 따지지 말라”고 건의했습니다. 아마도 간택에 외모에 많은 점수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
 삼간택날 마지막으로 뽑힌 처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별궁으로 들어가 가례 전까지 장래의 비빈으로서의 예비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이 50일 남짓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단축되는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간택돼 입궐한 여성은 세종의 장자이자 왕세자였던양녕대군의 부인 김씨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면 왕과 왕비의 연령은 큰 차이를 보이기도 했는데 인조는 44세에 15세의 장렬왕후를 맞았다. 숙종은 42세에 16세의 인원왕후를, 영조는 62세에 15세의 정순왕후를 왕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왕비는 폐위된 왕인 연산군, 광해군과 사후 추존된 왕인 덕종, 진종의 왕비와 폐비까지 모두 합하면 47명이었습니다. 왕비는 모두 25개나 되는 많은 가문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청주 한씨가 5명의 왕비를 배출했고, 여흥 민씨와 파평 윤씨가 각각 4명을, 그 외 안동 김씨, 청송 심씨, 경주 김씨가 각각 3명의 왕비를 배출했습니다. 선왕이 죽은 후, 즉위하는 왕이 어린 경우 왕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이때 (대왕)대비는 왕을 지명하고, 국왕과 함께 국가의 일을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왕은 상소나 장계를 직접 보고 받지만 (대왕)대비에게 알리고 논의했습니다. 한편 외척을 척결한다고 하여 친정 집안이 화를 당하기도 하였고,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한 삶을 보내기도 했으니 왕비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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