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편경을 소중히 여긴 이유는

2023. 7. 4. 17:4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편경

조선 초기 종묘제례악은 중국음악을 가져다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 음악을 새롭게 바꾸는데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편경이 있었습니다. 편경을 만들기 위해서 본을 뜨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돌 위에 본이 떠진대로 쇠줄을 갈아가며 돌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 다음은 편경을 나무틀에 걸 수 있도록 구멍을 내야 하는데 이 과정도 사람의 힘으로 쉼 없이 해야 완성됩니다. 편경의 표면을 다듬고 두께를 조절하기 위해 다듬고 문질러야 합니다. 편경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높이를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각  율관을 불어가며 정확하게 그 음을 낼 수 있도록 편경의 크기를 끊임없이 조절해 나갑니다. 경석이라는 기이한 재료로 세심한 손길을 통해 만들어지는 편경은 조선시대에 국보급 대우를 받는 악기였습니다. 이 같은 편경의 위상은 경국대전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편경을 망가뜨리는 자는 곤장 100대와 유배 3년에 처한다.’ 『경국대전』
기계화된 현대적인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편경 제작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두께를 조절해 음률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하더라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음정이 맞을 때까지 다듬어내고 두드리는 과정을 거듭해야 합니다. 규격화된 두께가 아니라 정확한 음이 나는 두께를 맞추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고 합니다. 정성스런 손길을 통해 완성된 16개의 편경을 나무틀에 고정시키는 것도 악기장의 몫입니다. 어떻게 매다느냐에 따라 편경의 공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경은 경석이라고 해서 같은 돌멩이라도 울림이 있는 돌멩이로 칠 때 아주 청아하고 그 소리가 맑아서 매력적인 악기라고 합니다.
‘전쟁이 나면 편경을 가장 먼저 숨겨라’ 『대전통편』 
편경의 주재료인 경석이 세종6년 국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중국의 것을 가져다 썼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수요를 맞추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명나라에서는 악기를 구하려고 해도 명나라에서 제례에 쓰이는 악기는 오직 황제만이 다룰 수 있다고 하며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편경은 국내에서도 제작되기 전에는 경석 자체도 구할 수 없는 재료였습니다. 궁여지책으로 흙을 구해 사용해보았지만 그렇게 만든 와경은 편경의 소리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편경은 제작 과정도 어렵고, 파손될 우려가 커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악기라고 합니다. 또한 편경은 온도·습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돌이 주재료라 음정이 변하지 않아 국악기를 조율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전란으로 악기가 파괴되어도 편경만 있으면 음 복원이 가능했기에 전쟁이 나면 편경의 대리석만 우물에 숨기고 피란 갈 정도로 편경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국보급 악기였습니다. 

편경은 궁중음악, 종묘제레악, 문묘제레악과 「낙양춘」, 「보허자」 등에서 연주되는 악기입니다. 그럼 편경은 무엇일까. ‘ㄱ’자 모양으로 만든 17개의 경석을 음높이의 순서대로 위아래에 두어 나무틀에 8개씩 매달아치는 악기입니다. 이러한 편경은 고려 예종 11년 (1116년) 중국 송나라에서 처음 들여왔고 고려 공민왕 때와 조선 태종 때에도 명나라에서 들여다가 궁중제례악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것으로 태어난 것은 조선 세종 7년 (1425년) 경기도 남양에서 질 좋은 경석이 발견되어 박연, 맹사성 등에게 지시하여 직접 제작에 들어갑니다. 편경의 제작을 지시한 세종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이칙의 음정이 높으니 몇 분(分)을 감하라’
소리만 듣고 경석이 덜 갈려 있음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편경은 조선의 표준음이 되었습니다. 대나무로 만든 대금은 입김을 불어 넣는 취구나 입술의 위치에 따라 음높이가 달라져 조율의 기준이 될 수 없었습니다.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현악기는 온도나 습도에 따라서 명주실이 줄어들거나 늘어날 뿐만 아니라 줄을 지탱하는 안족의 위치에 따라 음높이가 바뀌므로 다른 악기를 조율하는 데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돌로 만든 편경은 온도와 습도에 따라 팽창하거나 수축하지 않아 일정한 음색과 음높이를 유지할 수 있어 악기를 조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습니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정책을 통치이념으로 했던 조선에서 공자의 예악사상을 반영한 종묘제례악의 중요성 때문에 편경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 편경은 공자의 가르침이 담겨있는 악기이기도 한데요. 편경의 ‘ㄱ’자 모양은 하늘을 굽어 땅을 엎는 현상으로 ‘어진 임금이 되려면 항상 백성을 굽어살피라’라는 공자의 가르침이 담긴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편경과 더불어 대금, 피리 같은 악기로 연주하는 아악 곡을 작곡했는데 그 이름을 ‘백성과 함께하는 즐거움’이라는 뜻의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했습니다. 
편경은 경석을 ‘ㄱ’자 모양으로 깎아서 상단의 나무틀에 8개 하단에 8개의 경석을 매달은 형태이며 소뿔로 만든 ‘각퇴’라는 작은 망치로 경석의 끝부분을 쳐서 소리를 냅니다. 편경은 12율4청성(十二律四淸聲)을 내며 두께가 두꺼울수록 음이 높다고 하는데요. 두께가 두꺼울수록 편경의 진동수가 높기 때문입니다. 12율은 국악의 기본이 되는 음으로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을 말하며 4청성은 청황종, 청대려, 청태주, 청협종으로 일반음보다 높은 4음입니다. 

  편경을 만들 때 12음을 어떻게 결정했을까. 박연은 중국에서 전해진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따라 대나무로 만든 원통형 관인 ‘율관’을 12개 만들었습니다. 둘레가 약 2.7cm인 관에 검은 기장 낱알 1200개를 넣으면 관의 길이가 약 27cm가 되는데, 이 관을 황종 율관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만든 황종 음의 진동수는 528Hz로 서양음계의 높은 도(C, 523.25Hz)와 거의 같습니다. 삼분손익법은 ‘삼분손일’(三分損一)과 ‘삼분익일’(三分益一)을 교대로 적용해 음을 얻는 방법입니다. 황종 율관을 3등분한 뒤 3분의 2만 남기면 완전5도 위 음인 임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임종 율관의 3분의1을 더해(삼분익일) 3분의 4를 만들면 완전4도 아래인 태주가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 번은 삼분손일 다시 한 번은 삼분익일을 반복하면 12율을 모두 얻을 수 있으며 가장 높은 청협종은 진동수가 1260Hz에 이릅니다. 
‘우리나라 음악이 비록 다 잘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종 시대의 음악정비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국가 제례에 사용하는 아악(雅樂)을 갖추는 것이 첫 번째이고, 선왕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새로운 음악인 신악(新樂)을 완성하는 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세종이 음악에 대해 정비한 것은 비단 세종만의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고려 예종 11년(1116)에 북송(北宋)의 아악을 받아들여 국가의례에 고전(古典)에 맞는 음악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 음악의 미비를 걱정하고, 바로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조선 초기에도 숙제로 남았습니다.  태종 5년에는 명에 아악기 부족을 호소하고, 편종 . 편경 등의 악기 구매 의사를 전한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명에서는 아악기는 돈으로 사사로이 구입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 뒤, 몇몇 악기만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세종 대에 편경을 국산화한 것은 조선 초기 아악 정비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종 시대 음악정책의 직접적인 배경은 첫째, 유교 국가에서 예와 악의 조화로운 전승을 통해 왕도에 이르고자 한 근원적인 이상 둘째, 아악을 바르게 정리하여 국가제례의 격에 맞는 음악을 연주하려는 현실적인 필요성 셋째, 조선 건국을 위해 노력한 선왕들의 치적을 조선적인 ‘신악’으로 완성하려는 세종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예악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이 예악제도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세종의 음악사업으로 그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중요무형문화재 1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종묘제례악에서 편경은 여전히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어 우리 문화의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