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척과 조선의 기리고차

2023. 7. 2. 17:3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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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언가를 잴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측정도구입니다. 흔히 말하는 ‘자’도 이에 속하고 체중계도 이에 해당합니다. 인류는 이러한 것을 측정하여 기록을 남길 때에 단위를 사용하였습니다. 미터ㆍ피트ㆍ킬로그램ㆍ파운드 등이 그것입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단위는 기원전 60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큐빗’입니다. 팔을 구부렸을 때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중지 끝까지의 거리를 말합니다. 이 단위는 고대 이집트 시기는 물론 근대까지 사용되었습니다. 단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대부분 신체 일부분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예로 큐빗의 반을 나타내는 ‘스팬’은 손가락을 펼쳤을 때 엄지손가락 끝에서 새끼손가락 끝까지의 거리입니다. 스팬의 1/3인 ‘팜’은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의 너비, 팜의 1/4인 ‘디짓’은 손가락 한 개의 폭을 이릅니다. ‘인치’(inch)는 엄지손가락 폭입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 진시황이 가장 우선시한 국가제일의 과제는 바로 도량형의 통일이었습니다. 물물교환이나 상거래를 약속하는 기본 단위이자 조세와 공납에 필요한 경제의 기초제도였습니다. 그리고 물건의 길이를 정하는 것은 척(尺)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준을 소유하는 것은 왕의 권위이자 권력의 상징인데요. 
‘어진 정치는 도량형이 정확한 데서 비롯된다.’ -맹자-
그런 면에서 척(尺)은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2000년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척입니다. 10촌(寸)은 23.7cm로 이를 1척이라 했는데요. 한나라척의 1척인 23.7cm에 5촌을 더하여 35.6cm의 자가 나왔습니다. 한나라척 대신 고구려는 독자적인 측정 단위를 사용한 것입니다. 중국은 드넓은 평야지대인 반면 고구려는 산이 많고 척박했습니다. 토지의 면적으로 세금을 매기는 중국의 토지측량법은 토지의 품질이 고르지 않은 고구려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면적이 아닌 토지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척(尺)을 만든 것입니다. 고구려척은 35.6cm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양성의 도시구획, 국내성의 고분들과 장군총 그리고 신라 황룡사의 금당지와 9층탑, 백제의 정림사와 미륵사가 모두 고구려척을 기준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땅을 재는 데 있어서 고려법(고구려법)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 -일본 영집해-
고구려척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우리 조상들은 거리를 잴 때 자 또는 막대기를 사용하는 척측법, 발자국으로 재는 보측법, 새끼줄, 먹물 등으로 재는 승량지법이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정확성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세종 23년(1441년) 3월 17일, 왕과 왕비가 온수현으로 가니, 왕세자가 호종(扈從)하고 종친과 문무 군신 50여 명이 호가(扈駕)하였다. 임영대군 이구, 한남대군 이어에게 수궁(守宮)하게 하고, 이 뒤로부터는 종친들에게 차례로 왕래하게 했다.임금이 가마골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 행차에 처음 기리고(記里鼓)를 사용하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목인(木人)이 스스로 북을 쳤다."

기리고차

세월이 흘러 조선시대, 고, 세종은 왕비, 세자와 더불어 온천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때 기리고차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기리고차는 무엇일까. 기리고차는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는 조선시대의 반자동 거리측정 수레입니다. 장영실(蔣英實)은 왕명을 받아 중국에 유학하며 기술을 배워서 기리고차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개량하였습니다. 기리고차에 대해서는 제작당시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1731~1783)의 저서 『주해수용籌解需用』에 그 구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거리 측량은 이동하는 바퀴의 회전수에 비례해서 종과 북소리가 울리고 이 울림의 숫자를 기록하여 실제 거리를 측정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기리고차의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수레바퀴의 중간에 철로 만든 톱니바퀴가 있는데 여기에는 톱니가 10개 설치되어 있습니다. 수레바퀴와 가장 가까이 연결되어 있고 크기가 가장 큰 아래바퀴에는 120개의 톱니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수레바퀴의 축에 있는 톱니바퀴와 서로 연결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레바퀴가 한 바퀴를 돌면 같은 축에 있는 톱니바퀴도 한바퀴 돌고, 톱니가 10개니까 맞물려서 아래바퀴의 톱니가 10개 돌아가 아래바퀴는 1/12 바퀴가 돌게 됩니다. 수레바퀴가 12바퀴를 돌면 아래바퀴는 1바퀴를 돌게 됩니다. 아래바퀴의 축에는 톱니가 6개인 톱니바퀴가 설치되어 있고 이것과 연결된 중간바퀴에는 톱니가 90개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바퀴가 15바퀴 돌면 중간바퀴는 1바퀴 돕니다. 중간바퀴의 축에는 톱니가 6개인 톱니바퀴가 설치되어 있고 이것과 연결된 윗바퀴는 톱니가 60개입니다. 그래서 중간바퀴가 10바퀴 돌면 가운데 축과 연결된 바퀴는 1바퀴를 돌게 됩니다. 기리고차 수레바퀴의 둘레가 10자인데 수레바퀴가 12번 회전하면 아래바퀴는 한 번 회전하여 120자를 측정하고 아래바퀴가 15번 회전하면 중간바퀴가 한 번 회전하여 1,800자를 측정합니다. 아래바퀴가 10번 회전하면 윗바퀴가 한 번 회전하여 18,000자를 측정하게 되는데요. 결론적으로 기리고차는 수레가 1/2리를 가면 종이 1번 울리게 하고 수레가 1리를 갔을 때에는 종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으며, 수레가 5리를 가면 북을 1번 올리게 하고 10리를 갔을 때는 북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습니다. 마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렇게 울리는 종과 북소리의 횟수를 기록하여 거리를 측정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택시가 택시 바퀴의 회전수를 이용하여 얼마나 이동했는지를 측정하므로 이는 기리고차의 원리와 유사한 것이며 마라톤 경기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쓰이는 존스 카운터Jones Counter라는 장치도 기리고차의 원리와 같다고 합니다. 그럼 종이 온양 온천 행차 때 타고 간 기리고차는 과연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의 북소리를 내었을까.  현재 서울 경복궁에서 아산까지의 거리는 약 103㎞입니다. 당시의 10리가 약 3.74㎞였던 점을 감안하면, 세종이 온양 행차에 끌고 간 기리고차는 10리를 알리는 두 번의 북소리 신호를 약 27번 정도 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리고차는 다양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기리고차는 용도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23년에는 신조보수척(新造步數尺)을 사용해 각 도의 역로를 측정했으며, 30리마다 1표(標)를 세우거나 돌무더기를 쌓거나 나무를 심어 이를 표시합니다. 오늘날의 도로에 설치된 거리 표지판과 같은 용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종 25년에는 기리고차를 이용해 각 도와 각 읍 간의 거리를 실측 조사했습니다. 또한 기리고차와 간의를 사용하여 위도 1도를 측량하기도 했습니다. 

마라톤 경기의 거리 측정에 쓰이는 존스 카운터

조선에 들어서면서 『신찬팔도지리지』(1432년), 『고려사』「지리지」(1451년),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동국여지승람』 (1481년)과 그것을 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 등의 지리책들이 나오는데 이는 혼천의, 간의를 비롯한 천문기구들과 더불어 기리고차, 규형, 인지 등의 새로운 측량기구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조선시대 측량이 이용된 것은 지도 제작 뿐만이 아닙니다. 세금을 부과하는 토지를 조사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는데요. 토지 측량사업인 양전이 20년마다 실시되어 양안이라는 토지대장이 작성되었고 이를 기초로 농토에 부과되는 전세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농업사회의 조선에서 정확한 토지 측량은 합리적인 세금징수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세종 대의 기리고차 제작은 국가통치에도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연해,도서, 암초 등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한다,’ -강화도조약-
강화도 조약의 7조를 통해 일본은 조선의 해안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지도를 제작하였고 이러한 지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활용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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