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분증 호패

2023. 7. 6. 21:0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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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호패. 일반적인 호패는 사진에서와 같이 상원하방(上圓下方), 즉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 형태의 모양이었으나, 세조 때 시행된 승인호패는 직경 2촌의 원형이었다.

‘호구에 관한 법령이 있기는 하나 누락된 숨은 인부가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세종실록』
호패(號牌)는 조선시대의 신분증입니다. 16세 이상 남성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나라에서 발급한 호패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그 중요성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호패를 차지 않거나 잃어버린 자에게는 태형 50대를 때리고, 빌려서 주고받은 자들은 장형 80대를 때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죄지은 자가 거짓으로 차고 다닐 경우 사형에 처했습니다. 
호패법은 조선 태종 대에 실시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고려 공양왕 대에  시행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호패법은 원나라의 제도를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수군과 육군의 군정(軍丁)을 장부에 기입하고 호패를 착용하도록 하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태종은 재위 초부터 신료들과 지속적으로 논의를 주고받으며 호패제를 시도하였는데, 그 목적은 대체로 군정의 정비 그리고 부역과 생산을 위한 호구(戶口)의 확보에 있었습니다. 호패가 성인남성에게만 발급된 것도 이러한 것에 그 이유를 두고 있습니다. 
마침내 태종 13년(1413) 호패의 모양, 호패의 내용, 호패의 발급 및 착용 규정을 골자로 한 호패제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각 개인이 길이 3촌 7푼, 너비 1촌 3푼, 두께 2푼 크기의 상원하방(上圓下方)형 패(牌)를 신분에 따라 정해진 재질대로 고을 수령에게 제출하면, 수령은 호패의 내용에 개인의 신상이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 후 관인을 찍어 발급하고, 호패 발급과 착용 등에 관한 규정을 어길 경우 각각 상응하는 처벌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호패에 기재하는 신상 목록은 고위직 관리의 경우 관직만 적어도 되지만, 하급 관리는 관직과 함께 성명과 거주지를 쓰게 되어 있고, 일반인[서인(庶人)]은 성명과 거주지 외에 외모를 자세히 묘사하게 하였으며, 군인은 소속부대와 신장을, 종[노(奴)]은 소유주, 연령, 거주지, 외모, 신장을 모두 자세히 적도록 하였습니다. 양인 이하는 얼굴의 생김새를 쓰되, 얼굴 흉터, 귀의 쪼개짐, 언청이, 절름발이같이 외모에 드러나는 것을 모두 적은 것은 정확한 호구와 신분을 조사해 나라에 필요한 국역과 세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양인들의 거주지 이탈을 막는 통제조치가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호구에 관한 법령이 있기는 하나 누락된 호구와 숨은 인부가 열에 아홉은 된다.’ 『세종실록』
태종 때 호패제도는 실시되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는 이유로 시행 3년 만에 폐지되었습니다. 호패는 호구(戶口)를 파악하여 각종 국역(國役)을 부과하기 위해 발급하는 것이었기에 역을 부담해야 하는 양인(良人)의 반발이 컸다는 것도 그 이유였을 것입니다.
‘서울에서는 양종도회소에서 여러 사찰(거주) 승려의 본관과 생김새를 기록하여 예조[該曹]에 전보(轉報)하고, 지방은 유나사(維那寺)에서 여러 사찰의 승려를 기록하여 그 고을(의 관찰사)에 고하면, (예조와 관찰사에서는)곧 인장[印]을 찍어 줄 것. 만일 도첩에 명백하지 못함이 있으면 호패를 주지 말고 깊이 가려서 환속시킬 것.’  『세조실록』 
그러다가 세조 대에 다시 호패제도가 부활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호패를 담당하는 호패청(號牌廳)을 따로 두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세조는 재위 4년(1458) 호패법의 시행사목(施行事目)을 입안하고, 이듬해(1459) 이를 전국적으로 시행한 것인데요. 제도 부활의 목적은 전 국민의 신분과 직업에 대한 정확한 실태파악과 생산물 통제, 그리고 백성의 유망 및 도적의 방지에 있었으며 물론 군역의 확보도 부인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1461년에는 처음으로 스님에 대한 호패, 승인호패법이 실시되었습니다. 반면 태종 대의 호패제도는 스님들은 그 대상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이유는 스님에 대해서는 군정, 부역, 생산 등 국가가 강제할 사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조 대에 스님도 호패발급에 포함시킨 것은  세조의 호불책(護佛策)으로, 승형(僧形)을 가장한 유역인(有役人), 공사천(公私賤)의 피역(避役) 방지,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에게 일정한 국역을 마친 뒤 도첩과 호패를 발급해 주려는 의도였으며 승인호패제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호패와 호적의 완비는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고 또 양인을 모점(冒占)하고 있는 세력가에게도 불리하기 때문에 호패법을 엄격히 시행할수록 양인의 수는 줄어들어 결국 1469년(성종 즉위)에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조 대에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1625년 6월 호패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7월에 호패청 당상을 임명하고, 호패사목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1627년 1월 후금의 군대가 침략하자 비변사에서 호패법의 중지를 건의하여, 강화도로 운송할 호패성책(號牌成冊)을 불살라 호패 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이후 재시행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호패법과 군적법을 실시하여 민심이 이반한 것을 이용한 유효립(柳孝立) 등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호패제는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전 호패법이 실패한 이유는 양인이 호패를 받지 않고 도망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675년(숙종 1)에 앞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먼저 실시하고 이에 대한 사목을 제정하였고, 이어서 호패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때에는 호패가 아닌 지패(紙牌)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패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며, 간직하기 쉽고 또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며, 위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종이는 쉽게 닳고 찢어지기 쉽다는 반대론과, 종이로 하면 천 만 장이라도 인쇄할 수 있다는 찬성론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중국의 정변과 관련하여 지패를 받는 즉시 군병으로 징집된다는 등의 소동이 일어났지만, 숙종은 계속 시행하였습니다. 하지만 또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이전의 호패는 신분 간에 재질을 다르게 하는 등 차등을 두었는데, 지패는 그렇지 않은 점이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1680년 명의 유장 오삼계(吳三桂)가 사망하여 중국의 정변이 안정되자 소동도 가라앉아 군병 징집의 필요성은 없어졌으나 오가작통과 지패법은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질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2품 이상의 관리는 상아로 만든 아패(牙牌)를, 3품관 이하 관리는 뿔로 만든 각패(角牌)를, 그 이하의 양인은 나무패를 착용했습니다. 재질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도 달랐습니다. 착용자의 성명, 출생 연도, 제작 시기, 관(官)이 찍은 낙인(烙印)은 공통 요소이나, 상아ㆍ각패에는 나무 호패에 있는 신분과 거주지 정보가 없고 대신 과거 합격 시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패와 각패에는 신분증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주지 정보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아패와 각패가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공무원증의 역할을 한 것이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호패의 길이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평균 ‘3치 7푼’(약11㎝)이며 폭은 ‘1치 3푼’ 두께는 ‘2푼’으로 직사각형모양을 기본으로 하지만 공개된 호패들은 그 길이와 폭, 두께가 불규칙한 것도 있어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처럼 규격화해 발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호패 기피 현상으로 전국민에게 적용하지는 못했습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 국민의 1~2할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호패가 기피됐던 이유는 호패를 사용하면 군적에 올려지고 국가 부역을 져야만 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또한 국역을 피하기 위해 양반의 노비로 들어가는 현상이 늘고, 호패의 위조, 교환 등 부작용이 있어 5차례에 걸쳐 호패 사용이 중단되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서인들은 관아 주변에 있는 호패집에서 돈을 주고 만들어 제출하면 관아에서 낙인을 받아 패용할 수 있었으나 호패착용자체가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1413년 (태종 13년) 전국적으로 처음 실시된 호패법은 중단과 재시행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1895년 (고종 32년) 전격 폐지되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황국신민증으로 부활되었고 6.25 전쟁 당시 간첩식별을 위해 시도민증을 거쳐 1968년 대한민국 최초의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고 1975년 현재 13자리의 개인정보를 포함한 주민등록증이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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