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물사리 소송사건

2023. 11. 3. 08:4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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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3월 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희한한 노비소송이 벌어졌습니다. 원고 이지도는 일흔이 넘은 여인 다물사리가 양인이라고 주장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스스로 노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자신은 양인이라 주장하고 상대방이 노비라 주장하는 재판이었을 것 같지만 여기서 벌어진 재판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법에 따라 판결해달라는 시송(始訟)다짐 뒤 삷등(白等)을 했습니다. 삷등은 최초 진술을 뜻하는 옛말로 한자는 이두식으로 음차한 것입니다. 이지도는 다물사리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 소유 노비인 윤필의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그 자손들도 자기 집안의 (사)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의 양천제(良賤制)에 따라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도 노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물사리는 노비 남편과 결혼했지만 양인 신분을 지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경우 부인이 양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물사리는 그럼에도 이 송사에서는 자신은 성균관의 관비(官婢)인 길덕의 딸로서 관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자손들이 혹독한 처우를 받는 사노비가 되는 것을 막고 비교적 처우가 괜찮은 관비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사노(私奴)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관비이면 자손들은 모계를 따라 모두 관비가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재판은 피고가 지역에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면 영암이 아닌 나주에서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처음 이 소송은 영암에서 제기되었습니다. 그런데 원고 이지도가 피고 다물사리 측이 영암군 아전과 결탁하고 있다고 주장하자 공정한 재판을 위해 나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나주 목사 김성일의 명성도 한 몫했습니다. 김성일이 나주목사로 부임한 것은 1583년 8월이었습니다. 
학봉 김성일은 공정한 판결로 명성이 자자했고 까다로운 사건은 그에게 맡기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의 재판은 민사소송의 경우 피고가 법정에 출두하도록 하는 것은 원고의 책임이었습니다. 다물사리는 몇 차례 출석을 거부하며 도망갔으나 우여곡절 끝에 법정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피고 다물사리는 자신의 어미는 성균관 노비인 길덕이며, 그러므로 자신과 자녀들 역시 성균관 소속 노비라고 하였습니다. 원고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인 아비 이순과 어미 정소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양인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물사리가 자신의 노비인 윤필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며 그 딸이 6명의 자녀를 낳았으니 그들은 모두 자기 소유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유교적 관념에 근거하여 부계혈통을 지향했지만 유독 천인에게는 종모법을 적용했습니다. 이 소송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경제적 이권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노비가 양인 남성과 혼인했을 때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노비가 양인 여성과 혼인했을 때입니다. 이때는 종모법보다는 일천즉천에 따라 노비는 그 상전에게 귀속되고, 그 자녀들의 신분 역시 노비가 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선은 양인과 천인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혼인을 규제하였는데 이들 간의 혼인으로 인해 늘어나는 노비의 증가를 억제하고 세금과 군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 층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의 태종은 노비들을 없애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노비들은 세금을 납부하지도 않고 군역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반들이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노비와 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양인으로 삼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양반들은 자녀들 역시 아비처럼 노비가 되고, 그 주인이 소유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양반들은 자신들이 노비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핀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단종 대에  양반들의 의사를 받아들여 종부법으로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노비들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내종과 혼인한 양인 여성의 소생이 아비 신분을 따르니 천인은 날로 많아지고, 양인은 날로 줄어듭니다.’ 『명종실록』
조선후기에는 양천간의 결혼도 합법으로 규정하자고 하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이들 간의 결혼은 불법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금했지만 조선 후기 양반사대부들의 고문서를 보면 병산이라 하여 서로 같이 협력해서 애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양처병산이라 하여 합법적인 개념을 쓴 것입니다. 해당 문서를 보면 병산이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이는 노비와 양인 여성 간의 혼인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광범위하게 행해진 것입니다. 당시의 자료들을 보면 30% 내외의 남자 노비들이 양인 여성과 혼인합니다. 그것은 노비 숫자를 놀림으로써 사유재산을 증식하고자 하는 양반들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만약 노비끼리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자식은 어머니 노비의 주인의 소속이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 노비의 주인은 손해였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은 다른 집 계집종과 혼인한 자기 집 노비의 전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단 뜻입니다. 
그럼 다물사리의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당시 이지도 측에서 증인으로 내세운 이는 조숭진이란 사람으로 그는 이지도 댁 노비로 다물사리의 남편이었던 윤필이 자기 장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장인이 양인인 다물사리 사이에서 딸을 낳았고 그 딸이 구지와 결혼해 또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들이 이지도 댁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다물사리가 자신이 공노비인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비에 대한 처우는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파주의 안씨 가문에는 『안씨치가법제』라는 것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것은 노비는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세세히 적어놓은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규칙을 따르지 않았을 때 장을 때리는 처벌이 기록되었습니다. 노비들은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이를 때때로 잘못을 하면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노비 중에서는 그나마 신공노비가 형편이 나았는데 이들은 주인집에서 떨어져 지내면서 노동력을 대신해 몸값을 바치는 신공노비들이었습니다. 신공은 기본적으로 매해 바쳤으며 가난, 재해 등으로 신공을 바치지 못한 노비는 그 다음 해나 친인척에게 대신 받아서라도 노비 신공 수취를 정확하게 기록해 받아냈습니다. 노비들이 바치는 몸값은 사내종의 경우 베 두 필, 계집종은 한 필 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큰 부담이었습니다. 낮에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 때 돌아와서 베를 짜는데 한 필을 짜는 데에도 3개월이 걸렸습니다. 가사를 하고 남는 시간에 짠다면 베 2필을 완성하기 위해 6개월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해서 종이나 기름, 생선, 멍석, 소반 등 지역의 특산물이나 생활용품들을 바치는 것도 노비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다물사리가 양인임을 밝혀지면 그녀의 딸과 소생들은 이러한 부담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부유한 노비도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신공을 바치면 나머지는 자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다물사리의 사위 구지인 겨우 어느 정도 부유한 노비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이지도 측에서는 다물사리가 성균관 노비로 투탁했다고 했는데 투탁은 국가의 세금이이 부담스럽고 먹고살기 힘든 양인이나 주인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노비들이 권세 있는 가문이나 공공기관에 자신을 몰래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양반들은 노비를 늘리기 위해 호적을 위조하여 멀쩡한 양인을 자신의 노비로 만드는 이른 바 암록을 행하였습니다. 다물사리 측은 이지도가 호적을 위조, 즉 암록한 것이라 한 것이고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투탁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재판은 다물사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등인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판결문은 이지도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물사리는 양인이 되었고 그의 딸 인이와 6명의 손자들은 다물사리의 남편인 윤필을 따라 이지도 집안의 사노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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