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으로 간 조선인 조완벽
2024. 2. 3. 09:4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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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에서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꽤나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수도에서 우리 조상들은 베트남 사신들을 마주칠 때면 양국 사신 모두 한자에 능숙하고 한시(漢詩) 등 중국 문화에 통달했던 만큼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도 꽤 깊은 교류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 이수광은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일본 배의 선원이 돼 베트남을 방문했다는 조완벽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놀랍게도 베트남에서의 이수광 자신이 유명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조완벽이 일본 상선을 타고 베트남에 갔는데 베트남 관리가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이수광을 알겠지?하고 묻더랍니다. 그런데 조완벽은 어렸을 때 일본의 포로가 돼서 이수광을 모른다고 하니 베트남 사람들 전부가 말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수광이 읊으셨다는 시들을 보여주었으며 베트남 유생들은 그 시를 달달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러한 일화를 들려준 조완벽은 누구일까.
조완벽은 조선 선비로 1597년 20살 때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일본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그의 병사들과 진주 일대에서 도적질을 일삼았으며 조완벽도 이때 잡힌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는 10만 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인 포로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덕양이 염병으로 죽었는데 왜놈들이 다투어 칼을 시험한다며 시체를 갈라놓았다. 담양 출신 이승상은 어린 자식이 일본인의 칼에 죽는 것을 목도했으며 자신은 왜인의 외양간과 땔나무 머슴을 하고 있다. 양돌만은 사람들을 모아 배를 훔쳐갔으나 뒤쫓는 왜인에게 잡혀 배 안의 사람의 거의 반이나 베어죽임을 당했다.’ 『월봉해상록』
조완벽은 처음엔 일본인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한문을 안다는 것이 알려져 상인 집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리고 무역선을 타게 됐습니다. 당시 국제어(國際語)이었던 한문(漢文)을 아는 조완벽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배는 필리핀, 오키나와, 베트남 등을 오갔으며 현재 큐슈의 남쪽 ‘가고시마’에서 배를 타고 총 3번이나 베트남 호이안을 다녀왔습니다. 당시 베트남의 통치 이념은 유교였고, 한자가 공식 문자였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유교 경전으로 공부했고,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고자 했습니다. 하노이에는 유럽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드나드는 국제시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베트남으로 간 조선인 조완벽의 눈에는 3모작 농사와 100세 넘게 사는 여자들, 코끼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 등이 신기했습니다.
그때마다 3개월 정도를 머물렀고 그곳의 신기한 풍물을 보고 왔다고 합니다. 조선인으로 최초로 베트남에 표류했던 조완벽의 이야기를 이수광이 기록한 글인 「조완벽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가령 한쪽에서는 논을 갈고, 다른 쪽에서는 곡식을 거두는 광경을 보았으니 바로 3모작입니다. 또한 과일은 ‘귤’과 ‘여지’뿐이었고, ‘곶감’을 먹어본 사람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돼지처럼 새까맣게 생긴 소(물소)가 하루 종일 물속에서 놀다가 해가 지고서야 나오는 것도 신기했다고 합니다. 이 물소 뿔은 일본 상인이 많이 구입했고, 이렇게 구입된 뿔은 조선에까지 들어와 좋은 활을 만드는데 쓰였다고 했습니다. 특산물로는 침향, 물소, 꼬끼리, 공작, 앵무, 흰꿩, 호초 등을 소개했습니다. 베트남인 모습에 대해서는 남녀 모두 짧은 옷에 맨발로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고, 치아를 검게 물들이고, 머리카락은 풀어졌고, 스님처럼 치포로 머리를 두르고, 그 나머지의 절반을 뒤로 내리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양반들은 머리카락을 땋아서 건모 같은 것을 썼고,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고 있었으며, 무늬가 없는 비단 옷을 입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또한 장수하는 사람이 많고, 독서를 숭상하며, 시골에도 학당이 있어, 아동들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완벽은 이수광의 명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조완벽은 그들이 이수광의 시 중 특히 감탄한 대목은 아래와 같았다고 느꼈습니다. 山出異形饒象骨(산은 이상한 형상으로 솟았으니 코끼리 뼈가 넉넉하고), 地蒸靈氣産龍香(땅에선 신령한 기운이 피어오르니 용향을 생산하네). 실제로 안남국에 상산(象山)이 있는데, 조선선비가 이를 어찌 알고 지었는가 하면서 정말 절묘하도다 라면서 찬탄했다는 것입니다.
이수광이 알려진 것은 베트남 사신 풍극관 덕택이었습니다. 당시 조선과 베트남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은 1597년 정유재란을 맞아 명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신으로 갔습니다. 명나라 황실이 불에 타자, 그 일로 위문하기 위한 진위사로 파견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베트남의 사신 풍극관(馮克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같은 한자문화권에서 유학을 공부한 이들은 어느 정도 의사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서른넷 나이의 젊은 이수광이었지만 그 재능은 칠십 넘은 베트남 사신 풍극관에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수광에게 ‘대수필(大手筆)’이라 극찬하며 베트남 특산물을 한 아름 안기기도 했습니다. 이수광과 풍극관은 필담과 시를 나누며 우정을 쌓았는데 풍극관은 그가 가진 시집에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50여 일을 숙소에서 머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서로 시로 화답했습니다. 이수광이 “안남은 겨울도 봄처럼 따뜻하고 얼음과 눈을 볼 수가 없다고 하더이다”라고 운을 떼면 풍극관은 “남국은 겨울이 적고 봄이 하도 많습니다”라고 화답했습니다. 이수광이 다시 “안남에는 두 번 익는 보리와 여덟 번 치는 누에가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말하자 풍극관은 “두 번 익는 보리와 여덟 번 치는 삼도 있소이다”라고 운을 짚어 맞받았습니다. 이수광은 풍극관의 인상과 풍모와 관련해 “겉모습이 매우 괴이했다. 이가 검고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조회 때는 머리카락을 땋아서 망건을 쓰고 복식을 갖춰 입고 입궐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귀찮다는 듯이 곧장 벗었다. 그는 늙었기는 하나 상당히 정력이 있어 독서를 쉬지 않았다”고 묘사했습니다.
1606년 조선은 일본에 잡혀간 포로송환을 위해 제1차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게 됩니다. 당시 ‘경섬’을 단장으로 한 조선통신사 일행(504명)은 일본 교토로 건너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 만이었습니다. 먼저 일본 막부에 조선 정부의 국서를 건넸습니다. 조선과의 국교 제계를 원하던 막부 정권은 포로 송환의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두 나라가 새로 화친을 맺으려 하는 지금, 사로잡힌 남녀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어야 전대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속히 명령을 내려 즉시 쇄환하되 한 사람의 남녀도 빠뜨리지 않아야 앞으로 두 나라의 교제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해사록』, 1월 12일.
그러나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갖가지 방해와 역경이 있었습니다. 쇄환사가 오사카의 점포라는 바닷길을 지날 때 어떤 남자가 갈대밭 속에서 달려 나와 조선 사람이니 배에 태워달라고 애원한 것입니다. 조선인은 주인인 왜인이 놓아주려 하지 않아서 도망쳐 와 행차를 기다리며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갈대밭에 숨어 있던 남녀 수십명도 배에 오르게 했습니다. 포로를 옮기고 숨긴 일본의 행태에 쇄환사는 분노했습니다. 1607년 6월 경섬은 겨우 1천418명만을 데리고 6개월 만에 쓰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 1천418명 중에 조완벽도 끼여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쇄환사를 보내 일본인들이 숨겨놓은 포로 7500명을 찾아내 고국으로 데려왔습니다. 귀국 이후, 조완벽의 행적에 대해 이수광은 다음과 같이 지봉유설에 기록하고 있다.
“십여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탈없이 사니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한편 베트남 수도 하노이 근교에 풍씨 집성촌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마을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마을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베트남에서 ‘학문의 신’으로 불리는 그는 바로 베트남에 이수광의 시를 소개한 인물, 풍극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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