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발전에 힘쓴 군주 세종

2024. 1. 16. 09: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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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즉위 3년에 조선은 극심한 가뭄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허다했습니다. 세종은 급기야 신하들에게 경회루 옆에 낡은 재목으로 초가집을 지으라 명령합니다. 세종은 처소인 강녕전을 놔두고, 그곳에서 정무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세종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만류하는 신하와 소헌왕후의 눈물 어린 호소도 뿌리친 채 "백성들이 굶어서 죽어 나가는데 임금이 어찌 구들장을 지고 편한 잠을 잘 수가 있느냐"라며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런 생활은 무려 2년 4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종의 모습은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의지를 몸소 보인 것으로 정책이나 업적에서도 백성을 생각했던 세종대왕의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세종은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하고 달력을 만든 것입니다. 세종은 이 일이 사대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행한 것은 농시(農時)에 맞추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달력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종이 독자적인 역법을 계산하려 한 것은 24절기와 날수에 맞추어 농업생산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선이 농업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농업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농업 없이는 다른 산업의 발전을 꾀할 수 없었습니다. 농지를 늘리고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이 생각한 것은 바로 과학적인 농법으로 조선의 농업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전까지 조선은 중국의 농시를 농사에 적용했는데 이때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편차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우리만의 역법은 필요했고, 이러한 그의 생각은 수많은 과학기구의 발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간의, 혼천의 그리고 1년 동안의 절기 변화를 측정하기 위한 혼상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와 더불어 세종대왕은 자격루를 만들어 조선의 표준시계를 갖추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명하여 늙은 농부들이 말하는 경험담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두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한 다음, 그 내용을 다듬어서 정리하도록 하라. 늙은 농부들의 농사법은 모두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므로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농사직설

  그의 농업에 대한 관심은 농서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세종의 명령을 받은 정초와 변효문 등은 전국 팔도의 관찰사들에게서 농사 정보를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찰사들은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같은 내용을 명하였고, 수령들은 아전들을 풀어 늙은 농부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경험담을 들은 다음, 이것을 글로 적어 다시 중앙으로 보냈습니다. 그러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실용 농학서입니다. 씨앗 보관, 땅을 가는 법, 모판 만드는 법, 비료 만드는 법뿐만 아니라, 삼·벼·기장·조·콩·팥·녹두·보리·밀·참깨·메밀의 재배, 특히 모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 등을 자세히 소개하는 이 책은 간행되자마자 바로 다음 해에 전국 각지에 보급되어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단 세종 당시에는 이앙법이 관개시설의 미비로 본격적인 시행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앙법이 급속히 보급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일이었고 이로 인해 쌀의 생산량도 증가할 수 있었습니다. 
  『농사직설』의 내용이 대부분 중요 곡식류에 국한되고 기술이 간단하다는 한계가 있으나, 이 책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에 관해 편찬된 책으로는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후 지방 권농관의 지침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속속 간행된 여러 가지 농서 출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종 시대가 유독 가뭄과 흉년이 많았던 탓에 농업 생산량에 예민하였습니다. 농업국가 조선에서 강수량은 생존과 직결됐는데, 조선 초기 국가 경제는 가뭄 때문에 파탄에 이르렀고 굶주린 백성들은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조선의 그 어떤 왕들보다도 더 많은 기우제를 지냈던 세종이었지만, 그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쇠로 된 원통으로 측우기를 제작해 대 위에 올려놓고 빗물을 받아 전국의 강우량을 측정하게 하였으며, 수표로 하천의 수위를, 풍기로 풍향과 풍속 등 바람의 변화를 알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지역별 통계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농사에 적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433년(세종 15)에 압록강 중류 지방의 여진인을 정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파저강야인토벌이라는 일입니다. 파저강(일명 동가강) 일대에 걸쳐 사는 야인(여진인)들은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기를 이용해 조선의 강계·여연 등지를 자주 침입해 인구·우마·재산 등을 살상하고 약탈하였기 때문에 이 지방에 대한 정벌은 국경에 대한 안정화를 위한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홀라온과 올적합 여진족이 군사 100여 명을 거느리고 여연, 강계 지방에 들어와 난을 일으켜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세종실록』
  반면 조정의 많은 신료들은 이 지역을 포기하자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오랑캐와 충돌하느니 차라리 후퇴하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세종은 정벌군의 총사령관에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閏德)을 임명하고 평안도의 마보정군(馬步正軍) 1만명과 황해도 군마 5,000필을 징발해 총 2만명의 군대를 1433년 4월 10일 강계부에서 7대로 분군(分軍)해 정벌을 단행하였습니다. 이 정벌에서 생포된 여진인은 모두 248명, 참수된 자는 모두 178명에 달하였으며 그밖에 우마 177필을 노획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태종 이래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던 압록강 유역을 개척하고 여연·자성·무창·우예 등 4군을 설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역을 토벌한 것은 궁극적으로 안정된 농작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현재의 의견입니다. 


  ‘관리를 함길도에 보내어 새 땅을 찾아보게 하다.’ 『세종실록』
  농사뿐만 아니라 국방과 행정체계를 구축하여 변방이었던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 개발된 해시계나 농사시설 같은 신기술 농법, 의학기술을 가장 먼저 파견하는 특혜도 안겨다 주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은 가뭄을 타계하기 위해서 노인들에게 벼슬을 제소하기도 했습니다. 비가 내려야 하는데, 비는 하늘의 눈물입니다. 기뻐서 눈물을 흘려야 하니까 하늘이 감동할 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가 효를 중시하고 노인을 공경한다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해서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벼슬을 줘서 하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인데, 별 효과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도 세종 시대가 유독 가뭄과 흉년이 많았고 농업 생산량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세종이 취했던 방법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세금제도도 개혁합니다. 그 때까지 일률적으로 수확량의 10분의 1일 세금으로 거두는 과전법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면적이 좁은 상등전보다 면적이 넓은 하등전이 생산성이 떨어졌고 수세 방법에 있어서도 실제 농사의 풍흉을 파악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령이나 향리가 온갖 농간을 피우며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즉위초부터 있었왔으며 세종 9년에는 세종은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책문에 공법을 문제로 출제하기도 했습니다. 개선한 방안을 적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세금 제도인 공법에 대해 중앙 관리부터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 향리, 그리고 농민들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참여한 여론조사도 있었습니다. 세종은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각계 각층의 의견을 물었고 전국적인 여론조사가 15세기 초에 있었던 일이니 전세계적으로 그 예가 드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실시된 공법은 토지 한 결당 30두의 세금을 최하 4두로 낮추었고 이 시기 토지 1결의 생산량은 최고 1200두로 높아졌기 때문에 백성들의 조세 부담도 현격하게 낮아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국가에 비축된 곡식이 최고 500만 석에 이르니 이는 후대의 중종 때의 200만 석, 선조 때 50만 석보다 훨씬 많은 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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