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의 선택
2024. 2. 13. 09:5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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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입니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으로 그는 집현전 학사 정인지(鄭麟趾), 윤회(尹淮·1380~1436년) 등과 가까웠으므로 신숙주는 자연스레 윤회에게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신숙주가 1439년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처음 맡은 보직이 전농직장(典農直長)이었는데 이조(吏曹)의 담당 관리가 깜빡하고 그에게 오늘날의 공무원증에 해당하는 첩(牒)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관리를 탄핵해 파직시켰는데 신숙주는 스스로 이조에 나아가 “그 관리는 첩을 전했지만 내가 스스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일로 그 관리가 복직되었고 신숙주가 파면당했습니다. 불과 2년 후인 세종 23년(1441년) 신숙주는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제수됐습니다.
‘ “장부(丈夫)가 사방(四方)을 원유(遠遊)함에 이제 내가 이미 일본국(日本國)을 보았고, 또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에 경박(經泊)하여 예악문물(禮樂文物)의 성(盛)함을 얻어보는 것도 또한 유쾌한 것이 아니겠느냐?’
세종 25년(1443년),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였던 신숙주는 사신의 일을 마치고 태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안의 사람들이 대부분 공포에 떨었으나 신숙주는 태연하게 저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때의 일을 경험으로 쓴 글이 바로 『해동제국기』입니다. 이 책은 문신 · 정치가인 신숙주(申叔舟)가 성종(成宗)의 명을 받아 작성한 일본국과 유구국(琉球國)에 대한 정보를 기술한 한문 역사서 완성 이후 조선의 대일 외교에 있어 중요한 준거가 되어 일본과의 외교 협상에서도 자주 활용되었으며,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 18세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이덕무의 『청령국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서는 모두 『해동제국기』의 기록을 인용하였습니다.
1452년 8월 10일, 신숙주는 길에서 우연히 수양대군을 만나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당시는 분경금지법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하급관리가 산급관리의 집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입니다. 그럼에도 이 둘은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1452년(문종 2년·단종 즉위년) 9월 14일 세조(世祖·당시 수양대군)가 사은사(謝恩使)가 돼 중국에 갈 때 서장관으로 따라갔습니다. 어린 조카 단종의 즉위를 중국 황제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수양대군이 자청한 것이었고 세조는 신숙주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해 함께 갈 것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세조와 정치노선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 이양(李穰) 등을 궐문(闕門)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趙遂良)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습니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습니다. 이른바 계유정난의 난입니다.
신숙주는 계유정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는 승정원 우부승지 겸 지병조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자 신숙주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숙주는 명나라로부터 고명(顧命)을 받아왔습니다. 명나라 황제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유정난부터 양위 과정 전체를 정당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종이 살아 있어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는 것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문제 삼으면 조선 입장에서는 난처했습니다. 하지만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영상 윤자운의 누이동생이었다. 공이 세종조에서 팔학사에 참여하여 더욱이 성삼문과 가장 친밀하였다. 병자의 난에 삼문 등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그날 밤 공이 집에 돌아오니 중문이 환히 열려 있고 윤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공이 방을 살펴보니 부인이 홀로 다락 위에 올라가서 두어 자 되는 베를 가지고 들보 밑에 앉아 있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당신이 평일에 성학사 등과 서로 형제와 다름없이 사이가 좋았습니다. 오늘 성학사 등의 옥사가 있었다 하니 당신도 반드시 그들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통지가 있기를 기다려서 자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당신이 살아서 돌아오셨습니다.’하니 그가 무연히 부끄러워하며 몸 둘 바를 몰랐다.‘ -『연려실기술』, 이긍익-
지금까지도 적잖은 사람들이 신숙주를 비판할 때 인용하는 구절이지만, 신숙주의 부인이 죽은 것은 사육신 사건이 있던 해 정월이고 사육신 사건은 그해 4월에 있었다고 합니다.
신숙주의 한 살 어린 친구 성삼문이 있었습니다. 둘의 운명이 갈리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단종의 왕위 이양이었습니다. 숙부 수양대군의 위세를 어찌할 수 없었던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기기로 하였고, 성삼문은 옥새를 건네받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날 수양대군은 몇 차례나 사양했지만, 성삼문은 한동안 옥새를 꼭 잡고 수양대군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수양대군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년 뒤에 세조 2년(1456) 단종 복위운동이 있었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한 것입니다. 세조의 암살하자는 것이었지만, 예정일에 실패하고 이 계획을 밀고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운동의 실패로 성삼문의 아내와 딸을 비롯한 160여 명의 부녀자들이 세조의 공신들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신숙주도 그때 세 명의 부녀자를 사노비로 받았는데 이러한 처사는 다분히 개인적인 복수차원이라고 합니다.
신숙주는 세조에게 더 강력한 요청을 하였습니다. 금성대군 이유가 노산군을 내세워 반역을 도모하려 했다며 이유와 함께 노산군(단종) 역시 편히 살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숙주는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과 할아버지가 아끼던 신하였지만,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죽이자고 한 것입니다.
‘송씨가 관비가 되니 숙주가 공신비로 삼아 자기가 받으려 했다.’ 『월정만필』
이런 기록과는 달리 송씨는 조정으로부터 배려를 받으며 82세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신숙주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된 것입니다.
사육신의 한명인 성삼문은 옥사하면서 신숙주를 나무랐습니다. 그 때 신숙주가 부끄러워 세조 뒤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후에 성삼문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능지처참형에 처해졌지만, 사육신으로 불렸고 세조와 협력한 신숙주는 관료로 살아남아 업적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고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추진되고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결국 이들에 의해 의리나 명분을 강조한 성삼문의 행위가 자신들의 생각과 통하였고 그에 비해 신숙주가 평가가 깎여나간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에는 신숙주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자제하고 바로 바라보는 학문적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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