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

2024. 2. 29. 10:5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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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은 조선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본명은 허초희(許楚姬)이며, 허옥혜(許玉惠)로도 전하며 호는 난설헌이라고 합니다. 허난설헌은 어린 시절부터 아명을 초희라고 지을 정도로 재주가 비상하고 문장가의 소질을 지녔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딸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조선시대. 허난설헌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그녀가 꾸준히 글을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허난설헌은 집안은 꽤나 개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오빠 허봉은 동생 허난설헌에게 시를 가르쳤는데, 그녀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은 훌륭한 오빠의 지원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초당 허엽으로 홍문관 부제학,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동인과 서인의 당쟁에서 동인의 영수가 된 사대부의 지도급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첫째 부인에게서 아들 허성을 낳았고, 둘째 부인에게서 아들 허봉과 허난설헌 그리고 허균을 두었는데 이들의 문장이 모두 뛰어나 ‘허씨 오문장가’라고 불렀습니다. 
  허난설헌은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동생 허균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허균이 시를 지으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정도로 문학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난설헌은 이미 8살 때에 그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었습니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구슬 연못을 마시고 있네. 은평상에서 잠자다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미소로 요희를 부르며 푸른 적삼을 벗기네.’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의 일부 
  상량문은 집을 짓기 위해 대들보를 올리며 행하는 상량식에서 상량을 축복하는 글입니다. 허난설헌은 신선 세계 궁궐 ‘광한전 백옥루’에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상량식에 많은 신선이 참석했지만, 상량문을 지을 빼어난 시인이 없어 자신이 상량문을 올렸다는 의미입니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지었다고 믿기 힘든 문장 솜씨는 그녀를 조선 팔도에 한시 신동으로 소문나게 만들었습니다.
  허난설헌은 그림에도 뛰어났습니다. 「양간비금도」는 집 앞에서 아버지와 어린 딸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그림에서 소녀가 등장하는 것은 그 예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허난설헌이 재능을 키우는데 도움을 준 사람에는 동복 오빠인 허봉이 있었습니다. 허봉은 ‘난설헌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가 없고, 이태백과 이장길에게서 물려받은 소리’라고 했습니다. 동복 오빠 허봉이 여동생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여동생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좋은 시집이나 붓이 있으면 여동생에게 주며 응원했습니다. 허봉은 서자 출신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달(1539~1612)에게 허난설헌과 남동생 허균이 시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583년 허봉이 함경남도 갑산군에 유배되었을 때 허난설헌은 「오라버니 하곡께」라는 시를 지어 "산과 물이 가로막혀 소식도 뜸하니 그지없는 이 시름을 풀 길이 없네요."라며 오빠를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러한 것도 흔하지 않은 것이 양반 가문에서 서얼 출신을, 그것도 여자한테 스승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허난설헌은 조선시대에서 남녀차별이 없는 집안에서 있어 그 재능을 키울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난설헌은 15세가 되던 해 구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의 김성립과 혼인하였습니다. 조선 중기의 여자들은 보통 열 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이 되면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정한 혼처에 따라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허난설헌의 결혼상대 김성립의 집안은 5대가 대를 이어 문과에 급제한 안동 김씨 문벌 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허난설헌은 그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남귀여가라 하여 혼례를 치른 뒤 남자가 처가에서 생활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허난설헌은 시댁에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혼인형태를 친영제라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모든 사회 제도를 중국화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조정에서도 혼인제도나 가족제도를 중국처럼 친영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종가집이 생겨났고 종부는 문중을 지키며 평생 집안일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1년에 수십 차례의 제사를 지내고 그것은 오롯이 종부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허난설헌은 그렇게 시작된 고된 역사상 시집살이의 첫 세대라고 할 수 있었고 그러한 환경에서 그의 재능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집을 자주 비웠습니다. 과거 준비를 위해 주로 ‘접(接)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접은 과거를 준비하는 일종의 동아리합숙소라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 김성립은 번번이 과거에 낙방했고, 공부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허균의 서술에 의하면 남편 김성립과의 금슬은 원만하지 않았으며, 또한 허균의 성소부부고와 김성립의 묘비명을 토대로 했을 때 허난설헌이 시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않았고 두 자식을 잃는 과정에서 남편 김성립이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은 사실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 허난설헌이 두 자식을 잃었을 때 남편 김성립이 과거준비를 위해 강가에 집을 따로 지어서 생활하였고, 그로 인해 아내를 멀리하게 되어서 부부간의 정이 희박해졌다고 합니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계속되었습니다. 1580년 아버지가 경상감사의 관직에서 해임되어 돌아오던 중 상주에서 객사한 이후로 8년 만에 자식 2명과 자신을 가장 아꼈던 오빠 허봉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슬픔은 극에 달했으며, 결국 허난설헌은 시집살이 스트레스에 친가에 닥친 불행과 자식들까지 요절한 충격으로 병을 앓다가 1589년, 본인도 27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유언으로 "내가 쓴 문집을 전부 불태워서 없애다오"는 말을 남겼는데, 남동생 허균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누나의 시를 모아서 책으로 발간해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허난설헌의 작품이 모아져 『난설헌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먼저 알아본 것은 중국이었습니다. 허난설헌의 시에 반한 주지번은 “그 티끌밖에 나부끼고 나부껴 빼어나면서도 화사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뼈대가 뚜렷하다”고 칭송했다. 또한 “저 ‘유선사’ 등 여러 작품은 오히려 당대의 시인에 귀소할 정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실학자 홍대용의 기록에도 허난설헌의 시가 중국에서 얼마나 관심을 끌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난설헌집’이 중국에서 발간되고 150여 년이 흐른 뒤 청나라를 방문한 홍대용은 청의 학자에게 “그대 나라에 살던 경번당(허난설헌의 별칭)이 시를 잘 짓기로 이름나서 우리나라 시선에도 실렸으니 대단하지 않은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난설헌의 시는 일본에도 전해졌습니다.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 지로는 그의 시를 묶어 책으로 발간했고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허난설헌의 인기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역수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조선의 여성으로서 허난설헌이 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조선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에게도 표절 시비가 있었습니다.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동서 지간이던 이수광은 허난설헌의 시중 일부가 당나라 시인 조당의 시를 베꼈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허균이 지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허난설헌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신흠도 허난설헌의 시 중 절반 이상이 표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남성만이 시를 지을 수 있다던 당대의 시각을 반영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허난설헌이 시인 활동을 공식적으로 한 적이 없으며 허균이 지닌 난설헌집엔 허난설헌 혼자만의 습작품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당대 중국 시를 가져다 재창조하는 의고시가 유행했던 영향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편 “나이 스물일곱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과 9(3×9=27)의 수에 해당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하여 자살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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