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힌 여걸 정희왕후

2024. 3. 3. 11:0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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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왕후는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윤번(尹璠)의 딸로 1418년(태종 18) 홍주군아(郡衙)에서 태어났습니다. 윤번은 명문가의 후예였지만 비교적 한직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정희왕후는 당찬 아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날 윤번의 집에 궁궐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수양대군의 혼처 자리를 알아보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희왕후를 점찍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희왕후의 언니가 후보였습니다. 정희왕후는 아직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불쑥 끼어들자 부인이 나무랐습니다. 아직 네 차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찰각시는 이 아이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기상이 범상치 않으니 다시 보기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언니 대신 정희왕후를 선택하니 당시 나이 열한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수양대군과 혼례를 치루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세자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궁궐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종과 소헌왕후는 둘째 며느리인 정희왕후를 궁궐로 자주 불러들일 만큼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정희왕후는 궁궐에서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왕실의 법도를 따지면 둘째 며느리부터는 궁궐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세종이 모든 며느리를 예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휘빈 김씨와 두 번째 세자빈인 봉씨는 조신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내쫓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세종이 정희왕후를 더 좋아했던 이유는 외척이나 친정 세력들이 정치에 참여해 부정부패을 일으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종이 죽고 문종이 병약해 일찍 죽자,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김종서, 황보인 등의 훈구대신들이 실권을 장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인사권까지 장악하였고 그 중심에는 황표정사가 있었습니다. 황표정사는 문종이 어린 단종을 위해 임시로 만든 인사제도로 의정부에서 인물을 낙점하고 올리면 왕은 도장만 찍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문종이 죽음을 앞두고 어린 단종의 즉위가 염려되어 김종서에게 부탁하여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문종은 단종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인사를 제대로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왕실의 여자 어른이 후견인을 맡아서 직무를 대행하는 형태로 보완해야 하지만, 하필이면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하였고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도 이미 사망해서 수렴청정을 맡을 어른이 없었습니다. 단종의 유모이자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있긴 했지만, 조선에서는 후궁이 수렴첨정을 행하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종서 등 관록 있으면서  왕실에 충성스러운 정치인들에게 부탁하여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오히려 상황은 좋지 못했습니다.  신하는 임금을 보필하는 것이고, 임금이 내려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인데 신하가 임금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정희왕후는 의정부 대신들 사이에서 균열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하였습니다. 정인지가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에게 불만이 쌓이게 되자. 정인지의 아들 정현정과 자신(정희왕후)의 딸(의숙공주)를 혼인시킨 것입니다. 이러는 것은 수양대군의 세력을 불려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립되어 있던 수양대군에게 한명회, 권람 등의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이 일어났습니다. 거사를 앞두고 측근들은 의견이 갈렸는데 임금에게 이 일을 알려야 하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수양대군도 망설였으나 결심을 굳힌 그는 문을 박차고 나섰습니다. 
  ‘중문에 나오니 정희왕후가 갑옷을 끌어 입혔다.’ 『연려실기술』
  정희왕후는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면서 지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 일로 김종서와 황보인, 조극 등이 희생당했으며, 급기야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위까지 차지하였습니다. 정변이 일어난 지 3년 만의 일입니다. 그리고 정희왕후는 국모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때부터 정희왕후는 세조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세조가 백성들의 농사 사정을 돌볼 때나 여우를 사냥할 때도, 그리고 활쏘기 할 때도 정희왕후는 함께였습니다.
  세조는 악성 피부병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조카를 죽였다는 죄의식에 자주 악몽에 시달렸고 이를 보는 고스란히 정희왕후도 괴로웠습니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정희왕후는 불교에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세조 3년,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이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으며 세조 6년에는 둘째 며느리가 산후 5일 만에 죽고, 그 3년 뒤에는 세 살 된 인성대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1468년 세조마저 5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사망하면 후계자 지명은 왕대비나, 왕실의 할머니가 살아 있으면 대왕대비가 맡았습니다. 예종이 사망했을 때 예종의 비 안순왕후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어른인 정희왕후가 있어 왕위를 지명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네 살로 너무 어렸습니다. 그 다음 서열은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정순왕후의 선택은 자산대군이었습니다. 천둥번개가 내리치던 날, 대청마루에서 내시게 번개에 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도망가는 와중에도 어린 자산군은 그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그의 성격을 대담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산대군은 한명회의 사위였는데 아마 그러한 관계도 생각하고 자산대군을 선택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계자가 결정된 그 날에 바로 왕 즉위식이 있었는데, 예종이 죽은 지 겨울 7시간 만의 일로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성종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밀리지 않으려는 정희왕후의 계산이 있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당시 성종의 나이 열세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종 대신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니 조선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정희왕후가 글을 몰라 청정을 거부했다고 하나 인수대비와 대신들이 정희왕후의 청정을 요구했고 정희왕후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수렴청정을 사양한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고 정희왕후의 본심이었다고 합니다. 


  정희왕후는 성종의 교육에 신경을 썼으며, 따라서 경연의 틀을 잡았습니다. 정희왕후는 늘 경연에 참석했으며 경연을 잘 못하는 신하를 내쫓는가 하면 아침과 낮의 내용을 갖게 하여 성종에게 혼동이 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원로 대신들로 구성된 임시 국정 의논 관직은 경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정희왕후는 이들의 참석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조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이 예종이 되자, 인수대비(의경세자의 부인이자 성종의 어머니)와 안순왕후(예종의 계비)의 위차, 위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손아래 동서가 왕비가 되면서 서열이 뒤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를 다시 안순왕후 위로 서열을 올렸는데 이를 대신들이 비난하자 정희왕후가 자신의 탓이라며 성종을 적극보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종의 상도 3년에서 1년으로 줄였으며 종친세력이라 하더라도 왕권에 위협이 된다면 과감하게 처벌을 하였습니다. 성종 1년에 친족인 윤호가 도둑으로 오인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정희왕후는 이를 문제 삼아 국문을 명했고 세종의 손자이자 세조의 조카인 귀성군 이준이 역모를 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양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종 즉위 3년이 되자 정희왕후는 뒤로 물러나서 성종이 대신들과 정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럼에도 성종은 할머니 정희왕후를 찾아와 물어보고 결정했으며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세자에서 왕으로 격상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호패는 당시 민중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습니다. 호패는 개인의 신상을 기록하여 세금을 매기기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가혹한 국역을 피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호패를 차는 일도 있었으니 이러한 폐해를 알고 정희왕후가 폐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실의 고리대금업도 그 수를 크게 줄였으며 양잠과 뽕나무 재배를 적극 권장하는가 한편, 경상도에 기근이 들었을 때는 왕실 살림을 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종 7년, 성종의 나이가 열아홉에 이르자 정희왕후는 청정중단을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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