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김처선

2024. 3. 13. 09:2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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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드라마나 사극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김처선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극에서는 아예 그를 '왕의 남자'라는 타이틀로 주인공처럼 다루었고 각종 사극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김처선은 평생을 왕실에 충성했으나 결국 그 충성심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1504년 4월1일. 그 날 궁궐로 떠나면서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부인과 양아들에게 충성심과 효에 대해 특별한 당부를 했습니다. 양아들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내시의 신체적 구조 때문에 아들을 입양해서 길렀던 것입니다. 그날 연산군은 처용무 춤판을 벌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음란했습니다. 원래 처용무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인데 연산군은 이것을 자기 취향에 맞게 아주 음란한 것으로 만들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 퇴폐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이날 김처선은 작심하고 아뢰었습니다.
 "전하, 역대 임금님을 모셨습니다만 이토록 문란한 임금은 없었습니다. 제발 중지 하소서“
  그러자 연산군은 "환관 주제에 감히 혓바닥을 놀리느냐!"며 옆에 있던 활을 잡고 김처선을 향해 화살을 당겼습니다. 김처선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이번에는 칼을 들어 마구 휘둘렀습니다. 이때 연산군은 김처선의 다리를 절단했는데 "네 이놈 일어서라!"하고 소리 지르자 "다리가 잘렸는데 어떻게 일어섭니까? 부디 음란행위를 멈추십시오"하고 끝까지 직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김처선은 처참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근데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한 직언은 실록에는 언급되지 않았고 모두 야사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실록에서는 김처선이 술 먹고 어떠한 직언을 했는지 일절 언급되지 않았고 단지 그냥 술을 먹고 왕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세간에 알려진 김처선의 간언 내용과 최후는 대부분 야사에 의존한 것입니다.


  그런 김처선은 충신으로서만 역사에 기록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김처선에 대하여 호탕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세조시절 김처선은 혼나기 바빴습니다. 어떤 날은 직무를 게을리하다가 곤장을 수십 대 맞기도 하고 왕이 행차하는데 늦게 나와 또 곤장을 맞았습니다. 한번은 김처선이 취해 서울 중로에 누워버린 일도 있었는데 세조는 김처선에게 "시녀를 데리고 경도를 가다 취해 중로에 누웠다. 무슨일이냐"고 국문하니 김처선이 "처음 주방에 이르러 이운을 만나 마시고, 또 최해를 만나 탁주 한그릇 마셨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환관들이 궁녀의 연애편지를 왕족에게 전달하다 발각된 일로 인해 김처선이 세조 앞에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성종 9년(1478) 조선왕실에서는 큰 일이 일어났고 이 일은 김처선에게 기회였습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병에 걸려 전의가 갖가지 좋은 약과 침을 놓았지만, 나아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 인수대비를 적극간호한 것은 김처선이었고 인수대비의 병은 나았습니다. 이 일로 김처선은 정2품 자헌대부의 자리에 오릅니다. 
  세조에게 꾸지람을 받던 김처선이었지만, 성종은 김처선을 매우 총애했습니다. 김처선에게 여러차례 하사품을 내리기도 하고 중요한 왕실 행사에 대신들과 함께 자리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김처선은 성종이 죽은 후 연산군을 대신해 3년 동안 시능 살이를 했습니다. 시릉내시라 한 것인데 시능내관은 왕의 최측근만이 맡을 수 있었습니다. 연산군도 이런 김처선을 초반에는 매우 아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처선은 연산군의 광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연산군 10년(1504), 연산군이 김처선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폐비 윤씨가 피 묻은 적삼을 자신의 어머니 신씨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려달라고 했고, 인수대비가 죽자 신씨는 궁궐 나인들을 통해서 폐비 윤씨의 죽음과 적삼을 알렸다. 자순대비를 친어머니로 알던 연산군은 슬퍼한 뒤 시정기를 찾아서 대신들과 관련자를 죽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실제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실록에서는 임사홍과 만난 기록만 있습니다. 그리고 갑자사화 당시 인수대비는 엄연히 살아 있었으며, 연산군이 직접 인수대비에게 패악질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분노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폐비 윤씨의 죽음과 어떻해서든 관계가 있을 거란 김처선도 옥에 갇힌 것입니다. 하지만 옥에 가두라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처벌 지시를 곤장 100대로 바꿉니다. 연산군 입장에서는 궁궐 음식을 담당하는 설리를 감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감형 이유였습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폭정을 달렸습니다. 그의 뜻에 거스르면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를 보며 김처선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김처선에게 연산군을 바른 길로 가도록 섬겨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김처선의 바램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도 조선의 이념이었습니다. 
  한편 왕이나 양반은 환관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상당히 염려했다고 합니다.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밤낮으로 정치 생각만 하고 마음먹고 달려들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관들도 가족을 두어서 정치보다는 자기 처자식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김처선도 퇴근하면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한양에는 그의 악행을 비방하는 벽서가 붙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보고 크게 노한 연산군은 한글로 쓰인 책을 모두 불태우라는 명과 함께 ‘언문(한글) 금지령’을 내립니다. 연산군을 비방한 벽서가 한글로 쓰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언문 금지령에는 한글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말고, 이미 배운 자들도 한글을 쓰지 말라는 것과 함께 한글을 아는 자들을 관청에 고발하고, 한글을 아는 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으면 그 이웃까지 처벌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의 한글 탄압이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언문 금지령은 사실상 비방 벽보를 쓴 범인을 잡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은 언문을 아는 사람들의 글씨와 벽서에 쓰인 글씨체를 대조해 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벽서를 쓴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백성들도 연산군의 폭정을 지적하자, 김처선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을 것인가. 아니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보고고 모르는 척을 할 것인가였습니다. 
  ‘내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김처선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출근합니다. 김처선의 가족들은 옳다고 생각한 김처선의 행동을 말리지 못했습니다. 출근한 그 날에도 연산군은 춤을 추는 등 연회가 벌어졌습니다. 김처선은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쉽게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던 김처선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개 통하지만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김처선이 죽음을 각오하고 한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누구도 감히 내시 김처선처럼 직언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505년 경상도 봉화, 내시 김처선이 죽은 직후 권벌은 과거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통지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뜻밖이었는데 연산군이 ‘처(處)’와 ‘선(善)’이 들어간 답안지는 불합격 처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대신들의 이름까지 고치게 했습니다. 바로 김처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200년이 지나 김처선은 영조 임금 때 신분이 복권되고 충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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