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

2024. 3. 16. 09: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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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함의 자는 형백(馨伯), 호는 토정 또는 수선(水仙)이며, 고려 말의 저명한 성리학자 목은 이색이 그의 7대조입니다. 이지함의 외가도 명문가 집안으로 지함의 어머니는 광주 김씨 판관 맹권의 딸입니다. 김맹권은 일찍이 진사가 되고 문명이 높아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습니다. 이지함은 의금부 도사, 수원 판관 등을 지낸 이치(李穉)의 막내아들로 151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습니다. 1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형 이지번(李之蕃)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6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 형 이지번과 함께 한양으로 왔습니다. 이지함은 송악산에서 제자를 가르치던 당대 최고의 학자 서경덕의 제자가 되었으며  서경덕에게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배워 이에 통달했습니다. 
  스승 서경덕이 벼슬하지 않은 것처럼 이지함도 벼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의서와 잡술에 더 관심을 보였는데 이지함이 당시 중요시한 성리학보다 의학·복서·천문지리를 포함한 잡술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런 것들이 민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는 이이, 정철(鄭澈, 1536~1598), 성혼(成渾, 1535~1598)과 사귀기도 했고, 지방에서는 지리산 밑에 은거한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을 만나 밤을 지새우며 학문을 토론하였는데 그는 과거를 거부했기 때문에 쇠갓에 죽장을 짚고 산천을 돌며 이름 있는 선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참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열거했다시피 그는 성리학을 중히 여기는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갸우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었는데, 패랭이와 쇠갓을 쓰고 짚신에 대지팡이를 짚고 다녔습니다. 발 크기가 한 자를 넘는 거인인 데다 행실 또한 진중했으니 평번한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행에 가까웠는데 일부러 관인들의 앞길을 막고 바닥에 드러누웠고 포졸들이 끌어내려 하면 이지함은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머리에 솥을 뒤집어 쓴 채 돌아다녔으며 매 맞기를 자청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행동을 한 이유는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으며 그가 솥을 뒤집어 쓴 이유는 유랑하는 그가 어디서든 편하게 밥을 해먹기 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과거를 거부한 구체적인 이유는 절친한 친구였던 안명세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안명세는 을사사화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 주범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사료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사료가 을사사화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안명세는 붙잡혀 극심한 고문을 겨디다 못해 세상을 뜨게 됩니다. 이 일은 이지함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양제서 벽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로 장인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선 땅에서 선비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고 이지함이 유랑을 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토정이 비기에 능했다는 기록은 많이 있습니다. 토정은 장인인 모산수 이정랑이 충청도를 거점으로 한 역모사건에 연루될 것을 미리 알고 피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만 해도 ‘장가를 간다’고 해서 사위가 처갓집에 들어가 사는 일이 흔했으며 하루는 토정이 그 부친에게 “아내의 가문에 불길한 기운이 있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아뢰고 식솔들을 이끌고 서둘러 떠났습니다. 바로 그 다음 날, 토정의 장인은 사화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충주는 한 고을이 텅 비게 될 정도로 큰 타격을 입고 유신현으로 강등되었습니다. 한번은 우두커니 앉아 혀를 끌끌차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 여년 후에 나라에 큰 변이 있겠구나.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그러고는 아내와 자식에게 흙짐을 지고 뒷동산을 오르락내리락하게 하여 몸을 단련시켰습니다. 임진왜란이 날 것을 미리 알았다는것입니다.
  1573년, 56살이 되었을 때 그는 선조로부터 6품 벼슬에 임명되어 한때 포천현감과 아산 현감을 지냈습니다. 벼슬에 전혀 뜻이 없던 그였고 과거도 보지 않았지만, 탁행지사(卓行之士, 학문과 행실이 탁월한 선비)로 추천되었기 때문입니다. 포천현감이 된 이지함은 보령에서 걸어 임지에 부임하였습니다. 새 현감이 부임하자 관솔들이 온갖 음식이 가득한 잔칫상을 내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먹을 것이 없다"며 이를 물리고는 잡곡밥 한 그릇과 나물국을 쇠갓에 담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관리라도 잘못이 드러나면 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땋게 했습니다. 덕이 부족해서 아이만 못하니 스스로 느끼고 깨우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위해 임금께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벼슬을 버렸습니다. 4년 후 그는 다시 아산현감에 임명되었습니다. 관내는 흉년과 탐관오리들의 착취로 피폐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지함은 서둘러 걸인청을 세우고 이들의 구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걸인들에게 각자의 적성에 맞는 수공업을 가르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접 걸인들을 데리고 나가 장사를 가르쳤으니 걸인청은 근대적 재활기간인 셈입니다. 그는 또 관내에 양어지(養魚池)가 있다는 이유로 수시로 물고기를 진상해야 하는 고을 백성들의 고초를 헤아리고, 이를 폐지시켰습니다. 하지만 상급 관청의 눈초리를 받았던 그의 관직생활은 오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당대와 후대 선비와 사상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박제가의 책 『북학의』에는 이지함이 등장하는데 ‘토정 이지함이 일찍이 외국 상선 수 척과 통상하고자 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해외 통상을 통하여 백성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가 1574년 포천 현감으로 재직할 시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 내용은 육지와 바다의 자원을 개발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돕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었습니다. 당시 농업을 중시하고 그 외의 산업을 천시했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이익을 독점한 지배층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지함의 파격적인 주장에는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지함이 살던 16세기 중반은 백성들이 먹고살기 힘든 시기였습니다. 과전법 제도가 무너졌고 양반들은 제멋대로 토지를 사들였습니다.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왕실 소유의 토지를 늘려나갔습니다. 수많은 농민은 땅을 잃었고 그들은 지주들에게 땅을 빌려 겨우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수입이 적었고 굶주림과 학정에 사람들은 도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도적떼는 늘어갔습니다. 이 때 이지함은 농업을 근간으로 삼은 조선이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통해 전반적인 국가 경제의 부를 창출하고.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지함이 서경덕의 제자가 된 것도 서경덕은 개성 출신이라 상업의 가치를 알았고 그의 제자 중에 상업을 했던 사람이 많았으며 따라서 상업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파격적인 사상은 행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양반의 신분이었지만,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는 탁월한 상인이기도 했는데 신분이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상인은 가장 멸시받는 천한 신분에 속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일은 노비를 시킬 법도 한데 그는 직접 나서서 장사를 했습니다. 무인도까지 들어가 장사를 했으며. 박을 심어 바가지를 만들어 그것을 내다팔아 쌓은 막대한 부를 다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나눠주었습니다. 
  이지함하면 『토정비결』을 떠올리지만, 그가 토정비결을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고 합니다. 『토정비결』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이며, 그 이전에 『토정비결』이라는 제목이 언급되어 있는 문헌도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지함의 호 ‘토정’ 뿐이며, 그가 예언에 능통했다는 사실만 전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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