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 장군 곽재우

2024. 3. 6. 09: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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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일컫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선조수정일보』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 중 노비들을 데리고 나라를 구하러 의병을 일으킨 이가 바로 곽재우였습니다. 그는 1552년 8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곳이기도 하며 이러한 사례로 볼 때 조선시대 남귀여가혼을 살필 수 있기도 합니다. 그는 1565년(13세)부터 숙부 곽규(郭赳)에게서 『춘추』를 배우면서 학문을 닦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성여신(成汝信) 등과 함께 제자백가서를 널리 읽었습니다. 
  곽재우는 1567년 15세의 나이로 만호(萬戶) 김행(金行. 본관 상산)의 둘째 딸과 혼인했습니다. 그리고 김행이 남명 조식의 사위였으니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사위가 된 것입니다. 
  곽재우는 18세 때인 1570년(선조 3)부터 활쏘기와 말타기ㆍ글쓰기 등을 고루 익히고 병법서도 공부했습니다. 1575~76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서 살았으며, 1578년(선조 11)에는 명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수행해 중국 북경에 다녀왔습니다. 
  곽재우는 1585년 별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시켰으나 선조는 답안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그를 낙방시켰습니다. 곽재우가 쓴 답안은 「당 태종 조사전정론」이라는 글로 선조의 시정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다음해 8월 6일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슬픔을 컸을까. 그는 고향인 의령에서 낚시를 하며 보냈습니다. 
  그러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곽재우는 나라를 구해야 할 수령들은 재물을 챙겨 식솔들과 함께 깊은 산중으로 제 몸만 숨겼고, 경상감사 김수 외에도 경상좌병사 이곽, 경상좌수사 박홍, 김해부사 서예원, 창원군수 장의국, 의령현감 오응창, 현풍군수 유덕신 등이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에 분노했습니다. 1592년 4월 22일,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치며 최초의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거느리고 있던 노비 10여명과 함께 했지만 이틀 뒤에는 50여명으로 늘었고 곧 2000명이 넘는 수로 확대되었습니다. 


  한편 6월 26일 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양에서 지휘관들의 회의를 열어 조선의 팔도(八道)를 장악하는 임무를 나누어 정했는데, 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하장수인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恵瓊]가 우선 별동대를 이끌고 의령 방면으로 서진하였습니다. 일본군은 7월 4일 함안과 의령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남강 유역의 정암진에 도착했습니다. 남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는 정암진 인근에는 갈대와 수풀로 덮여 있는 습지와 모래톱이 넓게 분포해 있을 뿐 아니라, 하천의 양안에도 높은 둔덕과 절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은 강을 건너기 전에 정찰대를 보내서 말이나 무거운 장비를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길을 푯말로 미리 표시해 두었습니다. 곽재우의 의병은 밤에 일본군 정찰대가 표시해 두었던 푯말의 위치를 옮겨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좋은 지점으로 유인했습니다. 그리고 7월 5일 새벽에 남강을 건너온 일본군을 기습했습니다. 푯말을 따라 이동하다가 강변의 습지에 발이 묶인 일본군은 화살을 쏘아대는 의병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니 이것이 바로 정암진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왜군들은 서양식 무기인 조총을 들고 왔습니다. 그에 비해 관군도 아닌 의병의 무기는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곽재우는 조총이 사정거리가 50~100미터이고 한 번 쏘고 나서 다시 재장전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운용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다른 장수들은 조총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지만, 곽재우는 냉철하게 조총을 바라볼 줄 알았던 것입니다. 또한 곽재우는 10여 명의 장수들에게 자기처럼 홍의를 입고 백마를 타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매복시킨 뒤에 곳곳에서 나타나게 하여 교란시켰습니다. 왜군들은 마치 곽재우가 동시에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일본군은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습니다. 잔인한 보복이었습니다. 이에 곽재우는 마주 보이는 산에서 병사들에게 횃불 다섯 개씩 들게 하여 병력을 과장되게 표현했습니다. 또 징과 꽹과리를 치며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 여기 와 있으니 내일이면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왜적들에게 사로잡혔던 사람들이 돌아와 말하기를,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장군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선조실록』
  곽재우의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물리치자 관군도 그의 지휘를 받게 되면서 병력은 1천 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라도로 진격하던 일본군을 저지시켰고 그 결과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곽재우에 이어 여러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고 김시민은 진주성을 방어했습니다. 특히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장악하면서 승기는 조선이 잡게 되었습니다. 고향 의령의 지리를 잘 알았던 곽재우는 의장‧매복 등으로 적을 교란시켰고 일본군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라 칭했는데 그가 입고 있는 붉은 옷은 아버지 곽월이 명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 얻어 온 붉은 비단으로 만든 옷이었습니다. 
  곽재우는 이런 전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계속 승진했습니다. 그는 유곡찰방(幽谷察訪. 1592년 6월. 종6품)·형조정랑(8월. 정5품)을 거쳐 경상도 조방장(助防將. 정3품)에 임명되었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되었습니다. 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만에 그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의병장 활동이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조정과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선조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곽재우도 여러 번 벼슬을 마다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의 투옥과 의병장 김덕령이 무고로 옥사를 당하자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이후로 줄곧 조정이나 관군과 마찰을 있었습니다. 1592년 6월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패전하자 곽재우는 그를 패장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김수도 곽재우도 맞섰으나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었습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1594년 거제도 작전에서도 곽재우는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곽재우의 성격은 비타협적인 것도 한몫했지만, 결과적으로 곽재우의 판단이 옳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던 곽재우의 성격은 선조도 좋지 않게 생각한 것입니다. 낙향한 뒤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을 중심으로 그를 다시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선조는 냉담했습니다. 
  정유재란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는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 종2품)에 기용되었습니다. 일단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수축해 주둔하다가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겼으나 곽재우는 더 이상 활약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1597년(선조 30) 8월 계모 허씨가 별세하자 그는 현풍의 선영에 장사지낸 뒤 강원도 울진(蔚珍)으로 피신해 삼년상을 치렀습니다. 
  그의 노년은 매우 빈곤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608년 광해군의 교지를 들고 갔던 금군은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아주 초라했고 병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란을 일으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꽤나 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당시 의병에 참가한 양반들 대부분 수백~수천 마지기의 토지와 200~300명의 노비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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