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
2024. 6. 3. 09:0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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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되기 이전 1384년(홍무 17)에 전라도 익산에서 함경도 안변으로 옮겨와 머물던 이성계는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고, 1천 집에서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울리는 가운데 허름한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으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어지는 꿈이었습니다. 꿈이 이상해서 이웃 노파에게 물으니, 노파는 설봉산 토굴에서 9년째 솔잎을 먹으며 좌선하고 있는 무학대사에게 가 보라고 했습니다.
무학대사는 그것이 국왕이 될 꿈이라고 했습니다.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었으니, 닭 울음소리 ‘고귀위(高貴位)’는 ‘높고 귀한 자리’에 오름을 뜻합니다. 1천 집에서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울렸으니, 다듬이 소리 ‘어근당(御近當)’은 ‘임금 자리에 가까이 감’을 말합니다.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거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이며, 서까래 세 개를 사람이 짊어지면 ‘왕(王)자’가 된다고 해석하고는 해몽이 맞으면 이곳에 절을 세우고 원당으로 삼아달라고 하였습니다. 해몽한 대로 왕위에 오른 태조는 1410년에 편액을 내려 ‘석왕사(釋王祠)’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성계가 당연히 조선을 건국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작용하였고. 이에 더해 무학대사란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일화였습니다.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을 알아보았으니 말입니다.
무학대사의 법명은 자초(自超), 속성은 박(朴)씨이며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입니다. 경상남도 합천군 (陝川郡: 삼기(三岐)) 삼가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344년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습니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인도승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습니다. 고려말 퇴락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이성계를 만나 그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 예견하였습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을 암시했듯이 둘의 관계는 끈끈했습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인연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국왕인 이성계는 여전히 불교를 신봉했습니다. 태조 1년(1392년) 겨울, 태조는 무학을 왕사로 책봉하고 묘엄존자라는 호를 내렸습니다.
‘유교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작용이 하나’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는 저절로 잘될 수 있음’
당시 무학대사가 설법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사람들을 용서하여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태조는 그 청을 따랐습니다.
조선 1대 왕이 이성계라고 하나 이성계의 삶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 등이 배다른 형인 방원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태조는 둘째아들 정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태종이 기어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뒤 태상왕은 한밤중에 훌쩍 도성을 떠나 소요산으로 갔습니다. 소요산에 머물며 회암사를 오가던 이성계는 아예 회암사 내에 궁실을 지어 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태상왕이 회암사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회암사 내에 부왕이 머물 행궁을 짓게 했습니다. 이후 외국 사신들이 회암사를 들러 태상왕에게 인사를 올렸고, 태종도 간간이 회암사로 행차해 문안을 올리곤 했습니다.
이성계는 회암사에 머물면서 무학으로부터 계를 받고 수행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성계는 회암사에서 거의 출가자나 진배없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성계가 육식을 끊고 말라가는 모습을 본 태종은 무학에게 화를 내며 “만약 태상왕께서 육선(肉膳)을 들지 않는다면 내가 왕사에게 허물을 돌리겠다”며 협박했습니다. 이에 태조는 “국왕이 나처럼 부처를 숭상한다면 다시 고기를 먹겠다”고 하자 태종이 술을 한 잔 올리며 그러겠노라 약속했다는 일화도 전합니다.
무학대사와 관련하여 한양 도성 계획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왕의 스승인 무학대사와 당대 실권자인 정도전 간에 궁궐의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선조 때 대문장가인 차천로의 『오산설림』을 보면 무학대사는 동향을, 궁궐 조영의 책임자인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무학대사는 궁궐을 남향으로 하면 남쪽에 관악산이 놓이게 되는데, 관악산은 오행상 불(火)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궁궐을 눌러 화재가 빈번히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주례라는 중국 고전을 인용하면서 ‘예로부터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관악산이 정면에 있지만 한강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화기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반론을 폈습니다. 결국 실권자인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백악산(북악산) 아래 현재 위치에 경복궁이 자리 잡게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200년 뒤에 큰 난리가 일어날 텐데…”
정도전은 무학대사의 주장을 반박하면서도 찜찜했는지, 풍수에서 주장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비보(보완책) 조형물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만에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설화라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한양 천도와 무학대사가 연관돼 등장한 기록은 딱 한 번, 1394년(태조 3년) 8월 13일의 기록입니다. 임금이 남경의 옛 궁궐터에서 산세를 관망하며 천도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조운하는 배가 통해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라며 분위기를 한양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무학대사에게 어떤지 물어보자, 이미 태조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무학대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하소서.”
사실 한양천도와 관련해서 무학 대사의 역할은 이게 다였습니다. 몇 년 동안의 천도 조사 끝에 결론을 내리고 밀어붙인 사람은 태조 이성계였습니다.
이전에 도읍지를 정하라는 태조의 명에 무학 대사는 지금의 왕십리 지역에 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무학은 이곳으로 마음속으로 정했습니다. 이 때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갑자기 “이런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외쳤습니다. 깜짝 놀란 무학대사는 고개를 숙여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노인은 “여기서 10리만 더 가시오”라고만 말한 뒤 훌쩍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갈 왕(往)자에 십리(十里)를 더해 ‘왕십리’라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왕십리라는 지명이 이미 고려시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왕심리(往深里)’라는 지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대에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왕십리(往十里)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조선이 개국했을 때 무학 대사는 도읍할 곳을 찾다가 북한산 백운대부터 지맥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만경대까지 이르러 서남 방향으로 가서 비봉이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비봉에는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이른다.’라는 글씨가 크게 써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도선이 세운 것이었습니다. 무학이 이를 보고 길을 바꿔 만경대의 정남맥을 따라 백악 아래에 이르러 세 산맥이 하나로 모인 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의 터를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하지만 그 때 무학 대사가 만난 비석은 사실 북한산 순수비로 도선 대사와도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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