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

2024. 6. 13. 07:0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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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포털사이트 양대산맥인 네이버와 다음카카오는 사용자들에게 위치를 기반으로 한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용자들은 각 장소를 방문한 뒤 별점과 함께 간단한 후기와 소감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런 별점 평가는 주로 식당이나 카페에 대한 만족도를 기록하는 데 쓰여, 다른 네티즌들이 방문 여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2024년) 이런 별점 후기가 독특한 곳에 쓰이고 있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조선시대 왕릉을 방문한 뒤 별점 평가를 매기고 있는 것으로 해당 왕의 업적에 따라 별점이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높은 별점을 받고  있는 인물은 단연 세종대왕입니다. 현재 다음카카오에서 여주시에 있는 ‘영녕릉 세종대왕유적지구 세종대왕릉’은 별점 5점 만점에 무려 4.9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식당이었다면 단연 전국적 맛집으로 등극했을 만한 점수입니다. 네이버 별점은 4.55점입니다. 별점이 높을 뿐 아니라 후기도 꽤 우호적입니다.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이 한글로 발전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 바로 『용비어천가』입니다. 
 ‘해동의 여섯 용이 날으사, 일마다 천복이시니, 옛 성인들과 부절을 합친 듯 꼭 맞으시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川]가 되어 바다에 가나니.’ 용비어천가 1장, 2장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사가 짧은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내용입니다. 첫 장에 해동육룡이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입니다. 세종대왕의 6대조 할아버지까지 찬양하는 글입니다. 한글이 얼마나 한국어를 잘 표현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용비어천가에서 조선 왕조를 찬양하는 내용을 빌려 써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2장은 모든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될만한 까닭이 있음을 물과 나무에 비유하여 강조하였으며 3∼8장까지는 조선왕조의 시조인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할아버지들의 행적을 노래한 것인데, 이것을 살펴보면 이미 이때부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9∼14장까지는 태조의 위화도회군에서 한양천도에 이른 경위를 약술하고 있습니다. 위화도회군으로 민심이 태조에게로 모였으나 고려왕조를 지키려 하였고,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용납되지 않아서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15장에서 26장까지는 이씨가 왕이 될 조짐은 벌써 고려 초기부터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표면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27∼46장까지는 태조의 비범한 모습과 재주와 하늘의 도움을 받은 신기한 기적을 기술하였습니다. 47∼62장까지는 태조가 가장 큰 무공을 세운 왜적과의 싸움을 주로 노래하고 있으며, 북쪽의 오랑캐들도 매우 귀찮은 존재였는데, 태조는 이들도 무력과 덕으로 다스렸다는 것이며 63∼85장까지는 태조의 활쏘기 재주뿐 아니라 그의 학문과 인격을 기리며, 86∼89장까지는 중국의 이른바 성인의 행적을 앞세우고 있는 지금까지의 노래의 격식을 깨뜨려 중국의 일을 앞세우지 않고, 태조의 신력(神力)과 신무(神武)와 신공(神功)을 기리면서 그에 대한 칭송을 끝맺고 있습니다. 90∼109장까지는 태종의 용모 · 인품 그리고 하늘의 도움을 받은 일들에 대하여 노래하고, 그 부인의 내조의 공이 많았음을 기리며, 110∼125장까지는 뒷 임금들을 경계하는 내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장르적 성격 규정에서부터 논란이 많습니다. 역사적 장르로서는 조선왕조의 창업을 기리는 국문 악장이라는 점에 누구나 동의하지만, 장르 양식으로서는 다음과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① 조선왕조의 창업을 이룩한 태조와 태종의 영웅적 행적과 덕성을 찬양한 서사시라는 견해(張德順, 成基玉, Lee, P.H., 金仙雅 등), ② 조선왕조 건국의 당위성과 필연성에 관련한 이념적 주제적 교훈적 텍스트의 전형으로서 교술적 서사시(趙東一), 혹은 서사적 교술시(曺圭益)로 보아 교술문학과 관련시키는 견해, ③ 서정장르로서의 악장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서정시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金學成)로 갈라져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쓰인 최초의 글이라는 점에서 국어학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역사학적인 측면에서도 조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조선왕조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특히 태조 이성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조실록』은 다만 한 책만 썼기 때문에, 만약 후일에 유실된다면 안 될 것이니, 또 한 책을 더 베껴서 춘추관에 납본하고, 한 책은 내가 항상 볼 수 있도록 춘추관에 전교하라.’
  하지만 변계량이 이 명에 반대합니다. 국왕이 실록을 보는 것은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손으로서 조상의 업적을 알지 못하면 장차 무엇으로 감계할 것인가.’


  그러면서 『태조실록』도 이미 보았으니 『태종실록』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하들의 반대로 『태종실록』은 보지 못했으나 『태조실록』은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태조실록』에 불만을 가진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지어 조상의 업적을 알리고 싶어했고, 이어 『태조실록』에 대한 수정작업을 지시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에 참여했던 권제와 안지가 『태조실록』의 1차 수정에, 정인지는 2차 수정에 참가했는데 이는 『용비어천가』의 내용이 수저된 『태조실록』에 들어가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용비어천가』에서 정종은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정종이 오직 '공정왕'이란 시호만을 받고 제대로 된 왕 대우는 못 받는 때였던 데다가, 세종의 6대조다 보니 세종의 직계 조상이 아닌 정종은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장자 계승이 아니라면 자신의 왕위계승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특히 세종은 셋째 아들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아버지 이방원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바로 세우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첫째 양녕대군은 술과 사냥, 여자 등 당대의 노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써 안팎으로 온갖 사고를 쳤습니다. 그리하여 점점 부왕과 조정의 눈밖에 나더니 어리와의 간통 사건을 기점으로 왕가의 여론이 악화되었고, 그에 따라 폐세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호령대군은 양녕대군이 폐세자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 갑작스럽게 책을 펴고 공부하는 척했지만, 형 양녕대군이 "헛짓거리 그만하라!"하며 꾸짖었다고 하는데 이는 야사의 기록으로 딱히 정치적 배경이 없던 효령대군이 정말로 왕위에 욕심을 낸 정황은 없을뿐더러 양녕대군이 누구를 훈계할 처지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왕위에 오른 세종이지만, 3남이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정당성을 설파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용비어천가』의 편찬 의도 중 하나였습니다.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통해 조선왕조의 계통을 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의 혈통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종이 죽은 뒤에 묘호를 올리지 않고 다만 공정이라는 시호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실록 또한 태종의 실록은 『태종실록』이라 했으면서 정종의 실록은 『공정왕실록』이라 하여 한 등급 낮춘 것이고 조선 후기인 숙종 7년(1681년)에 이르러 왕실의 계보를 출판하는 선원계보교정청에서 아무 죄도 없는 공정왕에게 묘호를 올리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하여 묘호를 올릴 것을 건의해 마침내 정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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