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

2024. 6. 16. 07:0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 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인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의 왕대비를 움직여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사람도, 끝까지 고려를 버릴 수 없다며 버티던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이 세워지고 나자 이방원은 정치에서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데 힘을 모았던 사람들에게 ‘공신’이란 칭호를 내립니다. 벼슬을 주고, 땅도 주었지만 정작 이방원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조선 개국 때 충분히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지만, 세자 자리마저 막내동생에게 밀리고 말았습니다. 맏형은 조선이 세워진 그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둘째(후일 정종)가 왕이 되어야 했지만, 태조는 자신의 막내아들인 신덕 왕후 강씨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방원의 눈엣가시로 여겼던 사람이 바로 정도전입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정도전은 사병을 없애자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방원은 이것도 못마땅했습니다. 결국 이방원은 훗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정도전과 남은·심효생·박위(朴葳)·유만수(柳蔓殊)·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 등을 갑자기 습격하여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방석의 동복형(同腹兄) 방번도 함께 죽였습니다.
  조선의 권력은 이방원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방원은 바로 왕위에 오르는 대신 자신의 둘째 형 방과를 왕으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정종은 허수아비 왕일 뿐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권력이 정종이 아닌 이방원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차 왕자의 난은 점점 권력이 커진 이방원과 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을 도왔던 넷째 형 이방간 사이의 권력 다툼이었습니다.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왕이 될 욕심이 있었던 이방간은 이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라는 사람과 꾀를 내 이방원을 공격합니다. 2차 왕자의 난도 이방원의 승리였습니다. 이방원은 방간과 박포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방간은 맥없이 지고 말았고, 오히려 이방원의 위세는 더욱 드높아졌습니다. 그 후 이방원은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나 드디어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신문고를 설치한 것입니다. 중국 송나라에서 처음 시행했던 제도로, 이미 법제화되어 있던 상소, 고발 제도의 보완책으로써 항고, 직접 고발할 수 시설 중 하나였습니다. 신문고라는 북을 백성이 두드리면 임금이 직접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고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조선에서 이 제도를 모방해 1401년(태종 1년) 대궐 밖 문루에 청원과 상소를 위해 매달았던 북으로 초기에는 등문고(登聞鼓)라고 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에서는 주장관,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하여 사헌부에서 이를 해결하도록 하였는데, 이 기관에서 해결이 안되는 경우에는 신문고를 직접 울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절차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라서 소요시간이 대략 1년은 걸렸습니다.


  ‘"내 부덕(否德)한 사람으로 대통[丕緖]을 이어받았으니, 밤낮으로 두려워하면서 태평(太平)에 이르기를 기약하여 쉴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이목(耳目)이 샅샅이 미치지 못하여 옹폐(壅蔽)의 환(患)에 이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제 옛법을 상고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한다. …혹시 반역을 은밀히 도모하여 나라[社稷]를 위태롭게 하거나, 종친(宗親)과 훈구(勳舊)를 모해(謀害)하여 화란(禍亂)의 계제(階梯)를 만드는 자가 있다면 여러 사람이 직접 와서 북치는 것을 허용한다. 말한 바가 사실이면 토지 2백 결(結)과 노비(奴婢) 20명을 상으로 주고 유직자(有職者)는 3등(等)을 뛰어올려 녹용(錄用)하고, 무직자(無職者)는 곧 6품직에 임명할 것이며, 공사 천구(公私賤口)도 양민(良民)이 되게 하는 동시에 곧 7품직에 임명하고, 따라서 범인의 집과 재물과 종과 우마(牛馬)를 주되 다소(多少)를 관계하지 않을 것이며, 무고(誣告)한 자가 있다면 반좌(反坐)의 율(律)로써 죄줄 것이다. 아! 아랫사람의 정(情)을 상달(上達)케 하고자 함에 금조(禁條)를 마련한 것은 범죄가 없기를 기약함이니, 오직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臣僚)와 군민(軍民)들은 더욱 조심하여 함께 태평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이것은 1402년 태종 2년에 교서를 내렸는데 신문고를 설치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왕에 반대한다는 세력을 색출하는 것에 목적을 보인다는 것으로 ‘혹시 반역을 은밀히 도모하여 나라[社稷]를 위태롭게 하거나, 종친(宗親)과 훈구(勳舊)를 모해(謀害)하여 화란(禍亂)의 계제(階梯)를 만드는 자가 있다면 여러 사람이 직접 와서 북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태종 이성계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을 했고, 그로 인해 혹시 남아 있을 정적을 신문고를 통해 밝혀 내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문고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순수하게 백성들의 민원과 고충을 귀담아듣겠다는 것보다 정치적 성향이 같은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초기 격고의 안건들을 살펴보면, 일반 백성들이 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양반 계층들이 노비나 토지의 소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문고 제도를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1415년(태종 15년) 태종은 ‘근년 들어 격고를 통해 의견을 올린 것 모두 노비에 관한 일(近年擊鼓及申呈並皆奴婢事)로서 이런 쏠림 현상은 입법취지와 괴리된다’며 우려를 나타내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해결하지 못한 중외대소인민(中外大小人民)들은 육전(六典)에 의거하여 이 제도를 활용하라’(󰡔太宗實錄󰡕 十五年 七月 癸卯條)고 천명한 바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통치자들은 국가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토지와 인민을 통제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었습니다. 토지는 봉건사회의 기본생산수단이었으며 인민은 생산의 담당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토지문제 해결을 위해 양전사업과 호구법,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인민문제 해결을 위해 사원과 대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들을 조사하여 양민으로 복귀시키거나 공노비로 귀속시키는 ‘노비변정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마련된 노비변정사업은 1395년, 1400~1401년, 1405년, 1414년 네 차례에 걸쳐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소송 문제를 처리하였습니다. 1413년(태종 13년) 9월에는 이른바 노비중분법(奴婢中分法)이라고 하여 소송 쌍방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노비를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문고 제도는 노비변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이 신문고였습니다.


 서울의 궁문에 설치되어 있었던 신문고를 이용하기 위해선 원억자가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한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지방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태종 때의 총 격고 건수(41건) 가운데 거주지가 서울인 경우가 37건(90%)인 데 비해 지방인은 3건(7%)에 불과하였습니다. 신문고 제도는 사용 절차가 복잡한 까닭에 이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문고를 치기 전에 각 단계별로 전단계의 관원에게서 해당사안을 처리했다는 확인서[退狀]를 받아 제출해야만 다음 단계에 호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원억자의 신원확인이 되고 소원 내용을 담당 관리가 글로 작성한 후에 마침내 신문고를 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문고를 수직하는 영사(令史)가 의금부 관리나 당직자에게 먼저 보고하면 사유를 확인한 후 사안에 따라 신문고를 칠 수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이나 천민들이 접근하기 쉬운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수령이나 관찰사 또는 서울의 해당 관원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문제가 신문고를 통해 왕에게 알려지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형·무형의 압력과 회유를 통해 이 제도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문고를 일단 치게 되면 의금부의 관원이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지시에 따라 해당 관청에서는 5일 안에 처리해야 했습니다. 격고자가 억울함이 사실이면 이를 해결해주었지만, 거짓의 경우에는 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해당 관원이 잘못한 사실이 드러나면 그들에게도 책임을 물었습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조선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비어천가  (0) 2024.06.13
조선 건국 세력이 고려 불교를 비판한 이유  (1) 2024.06.06
무학대사  (1) 2024.06.03
조선을 구한 역관 홍순언  (0) 2024.04.03
토정 이지함  (1) 2024.03.16